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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 류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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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화와 토기

 

우리도 가마 하나 있으면 좋겠다.”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찰흙으로 작은 그릇 하나 만들더니, 대뜸 불에 구워 달라는 아이들. 찰흙을 빚을 때부터 빗살무늬 토기민무늬 토기네 할 때부터 알아봤던 거지만. 가마에 굽고 나면 유약을 바르네, 고려청자를 만드네, 조선백자를 만드네 할 녀석들이다. 결국 아이들이 조물락조물락 만든 것은 그냥 그늘에 말려서 대충 요모조모로 쓰일 것이다. 아이들은 찰흙놀이를 좋아한다. 장식용으로 공룡이나 뱀을 빚는 것부터, 쓸모를 따져 연필꽂이나 그릇을 만드는 등, ‘토기라는 인류문화의 원형에 가까운 놀이를 즐긴다.

토기는 인류문화 발전과 가장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빙하기가 끝나고 자연환경이 바뀌면서 인류의 생활도 급속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정착생활과 농경의 시작이었다. ‘혁명이라고까지 불리는 정착생활과 농경의 시작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 공구와 도구가 제작되면서부터 가능해졌다. 마제석기가 움집을 짓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공구였다면, 수확한 생산품을 저장하고 운반하며 조리하는 도구가 토기였다.

 

자연환경이 바뀌면서 인류는 식물성 식료에 의존하는 비율이 전보다도 훨씬 높아졌고, 새로운 식물의 개발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토기의 발명으로 날 것으로 먹거나 구워서 먹는 방식에서 벗어나 음식물을 삶거나 쪄서 먹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날 것 또는 구울 수 없는 동·식물의 섭취가 가능하였다. 이것은 인류가 더 많은 자연물의 섭취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음식물의 가짓수를 늘리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음식물을 연하게 하여 더 쉽게 먹을 수 있고, 위의 소화능력을 향상시키게 되었다.

 

토기는 음식물의 조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우물에서 물을 담아 부엌이나 일터까지 옮기거나 담아둘 수 있어 메마른 곳에서도 식수의 공급이 가능하게 되어 인간의 활동 공간의 확장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토기는 물 이외에도 곡물·장신구·공구·옷 등의 안전한 저장과 운반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토기에 여러 가지 무늬를 새기거나 장식품을 매단 토기를 만들어 제사나 성인식·혼례식 등의 물품으로도 활용되었다. 이와 같이 토기의 발명,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로의 분화는 토기제작 기술의 발달과도 궤를 같이하면서 동시에 사용 목적의 차이, 나아가서는 사회발전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실제로 토기는 점토를 가열해서 물에 용해되지 않는 소성물로 변화시키는 것으로써, “이것이야말로 확실히 인류가 화학적 변화를 응용한 최초의 사건이었다고 평가할 만큼 인류의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가장 원시적인, 원초적인 그릇이 바로 토기인데, 그야말로 흙과 불뿐이다. 유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구운 흙그릇이 토기이다. 한국 토기의 기원은 확실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지역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는 있을 것으로 보며, 신석기 시대를 시작으로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랜 기간을 거치는 동안 제작기술과 굽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시대에는 다양한 토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 이후 유약의 발달로 청자, 백자, 분청사기, 옹기와 같은 새로운 그릇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옛날 토기를 모체로 하여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릇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토기의 재발견-신라 토기

 

자기가 장석이나 규석 등을 재와 섞어 만든 유약을 입힌 그릇이라면 옹기는 잿물을 발라 구워 표면을 매끄럽게 한 항아리다. 반면 토기는 아무런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워 낸다. 자기가 진한 화장을 한 얼굴이라면, 옹기는 메이크업 베이스 같은 기본 화장만 한 것이고, 토기는 아무런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이다.

 

그래서 그릇의 숨 쉬는 능력으로만 놓고 보면 자기나 옹기보다도 토기의 기능이 훨씬 크다. 자기나 옹기가 잔 숨을 들이 쉰다면 토기는 심호흡을 하는 셈이랄까.

맨 얼굴의 토기 가운데에서도, 정선된 태토로 빚어져 섭씨 천도가 넘는 고온을 견디고, 흡수성이 거의 없고 두드리면 쇳소리가 날 정도의 단단한 토기를 신라 토기라 부른다.

신라 토기는 기원전 1세기경부터 만들어져 약 10세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동안, 우리 민족이 천 년이 넘게 애용한 것이다.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옛 가야 지역에 이르는 낙동강의 동서 지방에서 만들어졌는데, 특히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에서 다량 출토되었기 때문에, 신라 토기를 경주 토기라고도 부른다. 신라 토기는 경주 일원의 태토(胎土)를 바탕흙으로 사용하며, 유약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섭씨 1000~1200도의 고온을 낼 수 있는 전통적인 굴가마[登窯]에서 나무 장작으로 굽는데, 대개 짙은 회색 또는 청회색을 띤다.

 

고온에서 구운 석기질(石器質)로서, 신라 토기를 두드리면 마치 쇳소리와 같은 탄력 있고 강한 소리를 내며, 그 강도가 매우 단단하다. 청자나 백자가 저온에서 한 번 굽고, 고온에서 한 번 더 굽는 데 반해 이 신라 토기는 단번에 고온에서 굽기 때문에 더욱 단단하며, 만들기도 어렵다고 한다.

 

신라 토기는 유약을 바르지 않아 흙의 생명력이 살아 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생활용기로서 많은 이점을 갖게 된다. 먼저 신라 토기에 담긴 음식은 부드러운 맛을 낸다고 한다. 신라 토기의 살아 있는 기공들이 담긴 내용물의 독성이나, 강하고 자극적인 냄새들을 흡착하는 탓이다. 그래서 그릇에 담긴 음식물이 부드럽고 순한 맛을 내게 되는 것이다. 신라 토기 술잔에 맥주를 담아 마셔보면 그 거품이 매우 부드럽고 맛 또한 구수하고 부드러워진다고 한다.

 

둘째, 다른 용기에 물을 담으면 며칠 지나지 않아 물때가 앉고 부패가 시작되는 데 비해, 신라 토기에 물을 담아보면 오랫동안 물때가 끼지 않고 신선하게 유지된다. , 내용물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쌀이나 곡식들을 담아 두면 벌레가 생기지 않고 오랫동안 신선함을 유지하는데, 이는 신라 토기의 재료가 되는 태토의 성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종의 원적외선 효과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실내에 두면 공기를 정화하는 기능도 있다고 한다.

 

신라 토기를 빚는다

 

신라 토기의 대표적 장인으로는 국내 최초로 신라 토기 명장에 오른 유효웅 명장(69, 신라요 대표)과 기능전승자 류진용 씨(58, 한국토기 대표) 형제를 꼽을 수 있다. 이들 형제는 서로 힘을 합쳐 40년 동안 신라토기 재현에 열정을 받쳐 왔다.

 

이들이 경북 경주시의 많은 고분에서 발굴된 신라 토기들을 재현한 것은 40여 년 전이다. 신라 토기는 유약을 바르지 않았지만 토기의 겉면은 반질반질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1,300도 이상에 놓고 구우면 흙이 다 녹는데, 흙이 녹을 때 표면에 유리 성분이 번져 나오고, 가마 속 재가 함께 녹으면서 자연스레 막을 형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주군이나 광주분원 등에서 나오는 자기들 상당수는 가스 가마나 기름 가마로 구워 낸다. 불 조절이 쉽고 단기간에 파손품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구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라 토기는 반드시 장작으로 장시간 때야 하는 전통 가마로만 구워야 한다. 신라 토기의 색은 전통 가마 속 연기와 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동 물레가 아닌 전통 방식의 발 물레로 힘들게 토기를 빚어서 가마에 앉힌다. 가마는 45일간 쉬지 않고 불을 때야 한다. 불 조절이 관건이다. 가마의 구멍 속 불을 보고 가마 속 온도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가마 불 지피는 날이면 도공은 쉽게 눈을 붙일 수 없다. 불을 다 땐 5일째, 가마의 모든 구멍을 꽉 막은 뒤 또 5일을 기다린다.

 

가마 속 재와 연기를 토기가 흠뻑 빨아들이는 시간이다. 이후 가마의 재를 끄집어 낸 뒤 다시 구멍을 막고는 또 10일을 가마가 온전히 식기를 기다려 토기를 완성시킨다. 가마에 불이 붙은 지 20일은 돼야 작품이 되는 것이다. 신라 토기는 고된 땀과 오랜 기다림이 응축된 작품이다.

 

경주시 동방동에 있는 한국토기가 류진용(57)씨가 토기를 빚고 가마에 불을 붙이는 곳이. 그는 형의 작업을 돕기 시작하다 흙일을 시작해, 우직함으로 지금까지 해 오고 있다. 그는, “1,000년 전의 토기지만 그 모양과 문양, 쓰임새는 지금 봐도 매력적이고 독특합니다.”

라며 뚜껑을 덮는 접시, 받침대를 달고 있는 둥근 항아리, 왕관의 옥구슬 같은 장식을 매단 술잔이나 등잔 등을 내보였다. 토기에 매료당한 사람이 분명하다.

 

토기를 찾는 사람들이 예전엔 얼마나 출토품과 닮았는가를 따지더니 이제는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많이 좋아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처음에는 번지르르한 자기가 좋아 보이지만 일단 토기를 사용하다 보면 흙의 질감이 살아 있는 그 맛에 금세 깊은 정이 들게 돼요.”

그의 집안에 있는 대부분의 그릇이나 화분, 물통 등은 모두 토기로 만들어졌다. 우리 아이들처럼…….

그에게는 가업을 잇겠다는 든든한 아들이 있다. 경주시에서 신라 토기를 하는 장인 중 가장 젊은 국현(34) 씨다. 그는 요즘 신라 토기 제작 비법으로 맑은 차를 담는 다기를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땅 속에서 1,000년 이상을 묻혀 있던 민낯의 신라 토기가 이제 새로운 변주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2008년에 토기 부문 기능 전승자가 된 류진용 씨는 2001년에 흙으로 빚어낸 한국의 미로 제4회 전국관광기념품공모전 대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문화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한 전국관광기념품공모전에 기마 인물형 토기, 분황사석탑 등 옛 선조들이 남긴 국보와 보물을 축소해 구워낸 것을 출품했다. 우리 조상들의 탁월한 예술성과 섬세함을 원형 그대로 재현하면서도 부피가 작고 가벼워 관광기념품으로서의 조건을 고루 갖춘 점이 심사위원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2000년에는 한국의 기와와 전돌문양으로 은상인 문화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한 바 있었다. 그리고 2011년에 6월에는 코엑스에서 열린 9회 국제차()문화대전에 참가해 다양한 토기 공예품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아들이자 기능 계승자인 류국현 씨는 직접 제작한 차도구(茶道具) 및 공예품들을 전시했다.

 

국보-도제기마인물상을 추억한다

 

신라 토기의 가치를 재발견하면서 퍼뜩 도제기마인물상이 떠올랐다. 미술 교과서와 국사 교과서에서 보았던 낯익은 그것은 어쩐지 갖고 싶은 것이었다. 다리가 짧은 조랑말에 올라탄 모습이 생생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신라 토기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배우지 못했던 것일까.

한국의 유산 김은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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