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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韓船) 마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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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배를 타본 것은

그가 처음으로 배를 타본 것은 네 살 때. 봄날, 고기잡이 가는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고 간 곳은 청산도 앞바다였다. “물이 하도 파랗게 보여서 입고 있던 저고리의 옷고름에 물이 드는지 보려고 바닷물에 담가보았다고 한다. 오로지 바다, , 고기잡이 그리고 가난을 보며 자란 그 아이는 배 목수가 되었다.

 

전통 목선의 재현을 꿈꾸며 수십 년째 외길을 걷고 있는 한선 분야 명장(2005)이자 장보고 선박 복원자문위원과 이순신연구소 거북선복원고증위원(순천향대학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배 무이 마광남(70) 명장.

 

바다 한가운데 섬인 완도 가마구미에서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배 무이’(배 만드는 일, 배 만드는 사람)로 살아온 그는, 1969년 완도에서 배묻는’(배짓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군에서 제대한 이후 먹고 살 것이 딱히 없었던 터라, 동네 어른들을 따라 연장을 들고 나무 고르는 일이며, 대패질하는 법, 연장 만드는 법 등을 차례로 익혀 나갔다. 그 당시만 해도 남해안 등 우리네 어촌에는 아직 전통 목선이 대부분이었다. 어선이나 채취선, 주낙배 모두가 나무로 만든 한선이었다.

연장을 싸 짊어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찾아다니며 배를 만드는 고단한 나날이었지만, 일감도 많았고 재미도 쏠쏠했다.

 

내가 만들어낸 배가 바다에 나가는 것이 그렇게 재미지고 오져. 바다에서도 배들끼리 누가 더 빨리 간가 무언의 경쟁이 일어날 때가 많네. 이기고 온 선주가 아따 누구 목수가 만든 배 참 잘 가데라고 넌지시 한마디 건네면 그게 제일 큰 칭찬이고 보람이었지 뭐.”

솜씨 좋다는 선주들의 한마디에 어깨가 우쭐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해남에서 김을 채취할 때 사용하는 채취선을 만들고 나면, 강진 칠량에선 옹기배 주문이 들어왔다. 항아리·간장독 등 생활옹기를 싣고 남해안 일대는 물론이고 추자도·제주도까지 가야 하는 까닭에 길이도 길죽하고(12m), 돛도 3개쯤 달아야 했다.

 

도미·상어·가오리 등을 주낙으로 잡는 주낙배, 잡아놓은 물고기를 운반하는 삼대선 등도 그가 스승들과 함께 만들어 너른 바다로 내보냈던 배들이다.

 

동네 어른들이었던 그의 스승들은 그에게 잘 만든 배는 물의 저항력을 최소화할 수 있게 형태가 유연하고, 기울었다가도 재빨리 돌아올 수 있는 복원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특히 뱃머리를 부분을 날렵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각도가 너무 크면 기우뚱하고, 너무 작으면 속도가 떨어지는 까닭에서다. 배 만들기에 흠뻑 빠져 10여 년이 금방 지나갔다.

 

FRP어선과 한선

 

그런데 70년대 말부터 FRP어선이 나왔다. 그 때부터가 문제였다. 처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어민들이 하나둘씩 가볍고 상대적으로 견고한 그 플라스틱배로 전통목선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목선 수요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배만들기를 접고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고기잡이도 해보고, 방앗간도 해보고, 장사에도 취미를 붙여봤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손이 잡히지 않으니 하는 일이 잘 될 리 없었다. 비록 판로는 없지만 기회가 온다면 언젠가는 전통목선을 고스란히 살려보겠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

 

고민 끝에 다시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옛날처럼 배를 만들어 달라는 선주가 없으니, 배 모형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97년쯤이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죽으면 이것 만드는 기술도 끊기겠구나 생각이 듭디다. 자나 깨나 배 만드는 일이 머리를 떠나지 않더라고. 그래서 종이로 접어보기도 하고, 옛 문헌들 뒤적이고, 솜씨 좋은 어른이 아직 살아 계신다고 하면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배웠지요.

 

같은 연대의 배를 참고하기 위해 중국·일본의 것을 찾아보기도 하고, 선박에 관한 기록이라면 한 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강진 칠량의 옹기 운반선을 만들 때는 완도에서 강진까지를 열다섯 번이나 왔다 갔다 해야만 했다. 강진 칠량에 옹기 운반선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는 90세 된 노인이 있었다. 그 증언을 토대로 배를 조금씩 만들어나갈 때마다 차에 싣고 강진으로 달려가서 둘이 얼굴 맞대고 배를 요모조모 뜯어보며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연구했다.

 

그렇게 완도와 강진을 열다섯 번 오간 끝에 옹기선을 완성했다.

인자 흠잡을 데 없이 잘 만들어졌구만.”

드디어 노인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기쁨은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공력을 쏟았어도 일단 만들어진 것에는 미련이 없다. “언제라도 복원할 수 있게끔 내 머리가 기억하고 내 손이 기억하고 있으면 그 뿐.” 힘들여 만든 옹기 운반선도 강진군청에 기증했다.

 

다행히도 한선 복원에 대한 그의 열정과 기술이 알려지면서 그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노동부가 지정한 민족 고유 기능 전승자가 됐고, 전국 지자체 이곳저곳에서 그를 부르는 곳도 많아졌다. 한선의 원형이나마, 그대로 보존해 후손들에게 알리자는 취지에서 어촌민속전시관이나 박물관 등을 짓는 곳이 크게 늘면서 그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완도, 거제도, 신안 임자도 대광리 해수욕장의 주낙배·통구민·채취선·판옥선 등 여러 한선이나, 강진 청자축제 마당에 전시된 완도선 등도 그의 작품이다.

 

목선은 파도가 있을 때도 항해하기 좋고 환경면에서도 좋제. 기관만 제거해서 물속에 가라앉혀도 되고. 그러면 그것이 어초라고 물고기 아파트 역할도 하잖여. FRP배는 썩지도 않고 뒤처리가 골칫거리제.”

 

전통 목선의 모형 만들어내는 일에 바쁘지만, 역시 그의 맘은 바다에 가 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겠죠. 그 때를 위해서 열심히 복원하고, 기록해 놓아야죠. 열심히 하다보면 해상왕 장보고 어른께서 동양 삼국을 호령하고 다니던 시절의 배도 복원할 수있겠죠.” 그래서 그는 바쁜 와중에도 틈틈히 배 만드는 순서 등을 조금씩 기록해 두고 있다. 책으로 만들고, 경제적인 여유만 있다면 전시관을 세워 복원한 배들을 후손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싶은 욕심에서다.

 

그의 욕심과 책임에서 나온 책이 바로 배목수가 쓴 돛단배 이야기(미래촌)이다.

 

“40여 년 해온 일을 혼자 그대로 무덤으로 가지고 가는 건 세상에 크나큰 죄를 짓고 가는 것만 같아서스스로 기록의 책무를 떠안았다. 현장체험이 뼈대를 이루는 이 책에는 배 무이용 각종 공구와 배 만들기 과정, ··돛대···닻줄 등 범선 추진기구, 항법 등이 상세히 담겨 있다. 배 만들기는 물론 항법 역시 몸소 체험이 없으면 기록할 수 없는 일. 파도가 심할 때 노를 젓는 법 등은 수많은 경우를 당하고 겪어봐야만 알 수 있고 전할 수 있는 지혜다.

 

그리고 결국 그는 장보고선을 만들어냈다. 완도 장보고기념관의 장보고선(1/4선으로 7.5m). 또 고성군 당항포 거북선(22m), 영산강 황포돛배 등이 그의 손에서 나온 작품들이다. 완도 어촌민속전시관에 전시된 연근해어선·농토(農吐)·연승어선(주낙배받이배(상선상고선한돛해추선·죽방렴배 모형, 신안 임자면 대광해수욕장의 가거도선(9m)·떼배(5.2m)·완도선(9m)·통신사선(14m) 등도 그의 솜씨이다.

 

2011년에는 거북선을 만드는 과정을 담은 책도 펴냈다. 배 짓는 일을 평생의 즐거움으로 알고 있는 목수의 시각으로 쓴 이 책은 거북선을 해부해 놓은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거북선은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거북선이 만들어지기까지 배무이들의 시행착오와 어려움은 무엇이었나? 글쓴이는 거북선 복원사업에 배를 직접 제작하는 기능인들이 동참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그는 거북선의 모체가 되기까지 그와 유사한 배들이 존재했으며, 거북선이라 명명하기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배무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시점에서 거북선의 역사와 구조, 제작 장소 ,거북선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것을 제시한 간재집(이덕홍, 1541~1596)의 설명문을 기록했다. 부록으로 거북선의 그림 모음과 전진도첩 신경준의 병선론이 있다.

 

거북선하면 이순신을 떠올린다. 임진 전쟁을 이순신장군 혼자서 싸워 승리한 것처럼 생각해 왔으며, 어느 특정 지역의 해전만 부각시키는 잘못을 범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분들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거북선을 만들었던 장인들 또한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될 일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척의 거북선이 만들어졌으나, 거북선의 건조 과정과 활약상을 상세히 설명한 책들은 없고 오직 이순신 장군의 전술과 전승에만 매달리고 있다. 거북선의 역사적인 면보다 거북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책을 통해 배경을 소개했다.”고 덧붙였다.

 

배를 만들고 실제로 돛단배를 항해 해 보았던 사람으로 배의 추진기구인 돛과 노에 관해서도 그 구조와 사용하는 방법 등을 알아봤다. 한사람의 기능인으로서 어떻게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단 한가지만이라도 후대에 바르게 전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밝혔다.

 

겉은 투박하지만

FRP어선 때문에 목선이 사라져 갈 때에 비록 모형선이지만 다시 대패와 톱을 잡게 된 것은 지금은 고인이 된 고 이종옥·강성렬 두 스승의 영향이었다. 유년시절, 30이 넘는 연장통을 지게에 실어 나르며 스승들로부터 전통 목선의 제작비법을 전수받았는데, 그분들이 사용했던 톱과 줄, 대패, 끌 등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스승들이 물려준 것은 녹슨 연장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한선제작에 필요한 재주와 조상의 얼을 남겨주었다.

우리 전통 배는 외관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 눈으로 보아 전체적으로 매끄럽지 못하고 투박하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실제 바다에서 기능은 외국의 배들이 따라오지 못하지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모형선을 보고 속내를 알지도 못하면서 투박하다고 말하는 문외한들에게 꾸지람 대신 이처럼 자상한 설명으로 대신하면서 다시 연장을 잡는다.

한국의 유산 김은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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