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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피공예 박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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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겨울 끝자락, 전주 한옥마을 공예전시관에서 수구초심(首丘初心)’ 전시회 개관식이 있었다. 전주 문화재단에서 주관하고 조석진 씨가 출향 작가들을 초대해서 열리는 전시회로, 칠피공예 박성규(61) 씨를 비롯해 여러 작가들의 귀한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칠피공예(漆皮工藝)를 아세요?’ 아마도 칠피공예는 일반인들에겐 무척이나 생경한 이름일 것이다. 낯설고 결코 쉽지 않은 전통공예에 박성규 씨는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서 한송공방을 운영 중인 그는 2006년 칠피공예로 명장에 올랐다.

 

칠피공예(漆皮工藝)를 아세요?

칠피공예는 ()”()”가 합쳐져 있다. 칠은 옻칠을 말하고, 피는 가죽을 말한다. 결국 가죽에 옷(옻칠)을 입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옻칠은 나전칠기나 제기, 목기 등 주로 나무제품의 방부와 방수처리에 쓰였다. 가죽에 옻칠을 한다는 것이 일반에게는 생소할 수밖에 없지만, 사실 칠피공예의 역사는 깊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모피공예가 활발했는데, 근세에 들어 서양문명이 들어오면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가장 오래된 칠피공예의 증거는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장식의 재질이다. 천마도는 가죽으로 만든 안장 장식에 그려져 있었는데, 그 장식은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표면은 옻칠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칠피의 역사는 최고 삼국시대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칠피의 전통은 조선 중기까지 이어져 내려왔지만 그 이후부터 어찌된 셈인지 쇠퇴의 길을 걸어 근세에는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만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칠피작품은 서애 유성룡 선생이 쓰던 갑옷이다. 소가죽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오려 여러 차례 옻칠을 한 다음 다른 천에 배접하고 그걸 하나하나 이어 만든 것인데 처리가 얼마나 단단하고 야무진지, 화살로는 갑옷을 뚫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방수나 방부는 물론이고, 철갑옷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가벼워 기동력이 뛰어나다는 장점까지 있다.

 

나라 안에 단 한 사람-칠피공예가 박성규 씨

이렇게 뛰어난 분야가 갑자기 사라져간 데는 안타까움이 남지만, 다시 복원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어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그 주인공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칠피공예의 길을 걷고 있는 박성규 씨이다.

 

박성규 씨는 원래 나전칠기 장인이었다. 1953년에 태어난 그는 가난을 면하기 위해 15살 때 장롱공방에 취직했다. 당시 농방이라 불리는 농 만드는 집에서 나전 칠기를 처음 배운 소년은 결국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기술자가 되었다.

 

먹고 살기 위해 기술을 배우던 시절, 박 명장 또한 어려운 가정형편에 진학을 포기하고 기술을 배우게 된다. 이웃의 소개로 나전칠기를 알게 되고 농방에서 자개 문양을 그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당시 기술을 배우는 것은 녹록치 않았다.

요즘에야 임금 주며 일을 가르치지만 예전에는 절대로 안 가르쳐줘 일년 동안은 꼬박 공방청소만 해야 했지.”

나전칠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연탄 두 장씩을 새끼줄에 꿰어와 갈아야 했다. 일 년 내 농방 청소를 도맡아 하고 집에 가고 싶어도 돌아갈 차비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제대로 된 기술은 배우지 못했지만 그는 쉽게 포기 하지 않았다. 기술을 배우는 동안은 고단했지만 기술자가 되고픈 욕심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이것이 내 직업이다 생각하고 직업에 성격을 맞추었고, 이제는 오래하다 보니 비로소 기술이 된 거지.”

하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이 나전칠기를 하고 있어 박 명장은 그 만의 독특한 기술을 갖고자 했다. 그래서 쉬는 날이면 전시장, 박물관 등 새로운 공예작품이 전시된 공간이라면 대한민국 어디든 찾아갔다. 그러다가 어느 박물관에서 곰팡이가 퍼렇게 내려 앉은 낡은 서류함을 보고는 곧바로 그 작품에 빠져들었다. ‘가죽으로 만든 공예!’ 세월에 바래진 서류함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세련된 문양과 색감이 그를 끌어당긴 것이다.

나전칠기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잖아. 남들이 안 하던 것을 해봐야겠다고 해서 시작했지. 칠피공예를 하면서 이제 이 길이 내 길이다확신이 왔던 거지.”

곧바로 가죽으로 만든 상자에 도전해 보았다. 하지만 조선시대 이후 맥이 끊긴 칠피공예는 작품도 거의 없었고 문헌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처음엔 내가 배운 나전칠기와 기술이 비슷할 것이라는 추측은 했지만 어떻게 할 것인지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구두 만드는 아는 형님에게 힌트를 얻어 나무상자에 가죽을 붙이고 구두약까지 칠해봤습니다. 웃긴 일이었지만 만드는 사람은커녕 이것을 아는 사람도 없었으니.

결과는 참담한 실패. 이후 수십 번의 시도를 했지만 건조 과정에서 나무가 틀어져 폐기처분한 가죽이 산더미를 이뤘다. 생활고에 시달려 부인 김용순 씨마저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박성규 명장은,

이거 하려면 고집이 있어야 해. 가족들이 당장 어려워해도 내가 좋아하니까 밥이야 못 먹고 살겠냐는 생각으로 밀고 나갔지

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모두들 경제적 어려움으로 칠피기술을 중도에서 포기했지만 그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는 힘들었지만 그 고집이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주었고 그를 끝까지 믿어주고 어려움을 극복해준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때마침 일본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한국에서 버는 돈의 3배나 되는 큰 금액이었다. 그러나 박씨는 거절했다. 지금껏 매달려온 것을 차마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나선 가죽공예의 길은 처음부터 험난할 수밖에 없었다. 남아 있는 기록이나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죽에 옻칠을 하면 가죽이 질겨지고 방부와 방수처리가 가능하다는 것만 알았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결국 그가 해왔던 나전칠기의 기술을 접목하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터득해 나갔다. 습기에 약한 가죽을 강하게 하는 데에는 생옻칠을 반복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 그의 작업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가 재현해낸 작업 공정은 우선 원피를 구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원피는 가죽의 두께나 소용에 따라 여러 가죽을 찾아 쓴다. 흔한 소가죽부터 돼지가죽, 양가죽, 철갑상어가죽을 비롯해 거북이 등껍질 가죽까지 그가 재료로 쓰지 않은 가죽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원피를 적당한 크기로 재단한 후 디자인된 밑그림을 그린 백지(백골)를 붙여 모양대로 잘라낸다. 기본적인 형상을 잡아가는 과정인데, 잘라내거나 구멍을 내는 등 가죽을 마름질 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 다음 본격적인 칠작업이 시작된다. 초벌로 생옻칠을 하고, 아직도 부드러운 가죽 위에 옻칠과 찹쌀풀을 섞어 쑨 옻칠풀 작업을 한다. 옻칠풀 작업은 보통 여덟, 아홉 번 정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을 거치면 가죽은 비로소 나무같이 딱딱해지고 강해진다. 방부와 방수도 역시 이 과정을 통해 완전히 이루어진다. 이렇게 완성된 가죽 위에 본격적인 멋내기 작업이 이어진다. 작품에 따라 나전 상감이나, 다른 재질의 상감, 조각, 투각 등의 과정을 거친다. 옻칠로 마무리하고 광내기 작업을 거치면 최종적인 칠피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칠피공예 작품을 첫 출품한 1992년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관광부장관상을 받았다. 이후 칠피공예에 눈뜬 그는 전통유물을 복원하고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는 데 열정을 기울였다. 독일 함부르크 박물관의 황칠문서함’, 덕수궁의 인장함등 각종 전통유물을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세계 유일의 갖바치가 만든 인궤

그동안 그가 만들어낸 각종 칠피공예 작품들은 크고 작은 행사에서 많은 상을 받았음은 물론이고, 전국의 박물관 등에 재현 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작품이 주문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계에 대한 발전은 거의 없었다. 그가 작업에 몰두하는 사이, 가계는 아내 김용순 씨의 몫이었다. 그 덕에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칠피장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어쩌면 그에게서 마감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 전통 공예의 운명이 모두 그렇지만 칠피공예 또한 그 운명에서 비켜나 있지 않다. 아무도 이 일을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도 한두 번 배움을 청한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제자의 생계를 책임져 줄 형편이 못되는 그로서는 떠나는 제자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 사이 외국인 몇이 그에게서 칠피를 배워갔다. 주로 일본에서였지만 우리의 전통공예를 외국에 알렸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그를 기쁘게 한다.

 

2007년에는 새 국새를 만드는 ‘33인의 명인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명인들이 만든 새 국새는 현시대에서 제작할 수 있는 최고의 예술품이 될 것이었다. 국새를 보관하는 내함인 인궤가 바로 박성규 명장의 몫. 인궤에 특이하게도 어피(魚皮)가 쓰였는데, 한반도가 삼면이 바다란 점에 착안했다고 한다. 칠피 명장 박성규 씨가 두 달간 전국의 어시장이란 어시장은 다 찾아 헤맨 끝에 찾아낸 120cm 길이의 거대한 철갑상어의 가죽이다. 박 명장은 철갑상어가죽은 우툴두툴한 비늘이 많아 웅장하고 용맹스럽다인궤 뚜껑 전체를 가죽 한 장으로 마감해야 해서 적당한 크기의 상어를 찾는 데 애를 먹다 부산 자갈치 시장을 거닐던 중 횡재하듯 눈에 띈 놈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 번, 두 번 덧칠하면 칠해질수록 가죽의 생명력은 더욱 강해진다. 가죽에 옻칠을 해 보존력을 높이는 칠피공예는 까다롭고 정교함을 요하는 기술이다. 현재 칠피공예 기술을 이어가는 이는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성산 박성규 명장이 유일하다. 그의 손길이 닿은 칠피에서 시간은 멈추고 역사는 되살아난다.

한국의 유산 김은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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