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팩·찾기
02.27 (월)
2012 - 2018 『한국의 유산』발굴ㆍ조사 사업
next
prev
김화영(국가상..
양광호(국가상..
윤여경(국가상..
정현도-한민대..
`국기태권도국..
윤여경(국가상..
고양시 홍보는..

목공예 분야의 떡살 명장 김규석




소중한 우리 떡살

서울 인사동이었던 것 같다. 쓸모를 알 수 없는 골동품들과 함께 아이들 무늬 찍는 장난감처럼 다식판이 나와 있었다. 떡살인지 다식판인지 구별도 못하면서 괜한 호기심에 다식판을 샀다. 그 다식판은 몇 번의 이사를 견디며, 이십 여 년이 흐른 지금도 벽에 걸려 있다. 우리 집을 찾는 사람도, 우리 집 아이들도 저게 뭐냐?”라고 묻지 않는다.

투박하게 아무렇게나 깎아 놓은 우리 집 다식판을 보다가 소중한 우리 떡살(미술문화, 2005)에 실린 것들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깎아 놓았을까, 아름답다. 아이들 눈에도 예뻐 보이는지 그 책 사면 안돼?”라고 묻는다. 책 표지도 삼베고, 곳곳에 아름다운 사진들이 실려 있어 만지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이다.

일반적인 떡살은 몇 가지 도안을 반복해서 사용하지만 저자 김규석 씨(55)700여 점의 떡살을 모두 다르게 제작했고 특히 잊혀져가는 전통무늬를 각각의 떡살에 새겨 넣었다. 잊혀진 전통의 불씨를 살리려는 고집스러운 장인정신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한국의 떡살과 무늬 1에 해당하는 이 책과, 2권에 해당하는 아름다운 떡살 무늬모두 김규석 씨의 떡살에 대한 강한 사랑을 보여 준다. 17년에 걸쳐 1000여 점을 만들고 3년 걸려 떡살과 떡살 무늬의 모든 것을 담아 역작 두 권을 펴낸 것이다.

"기능인은 물건은 잘 만들어도 책은 내기 힘든 데 책을 낸 덕분에 명장까지 된 듯 싶어요. 그 책에 1300여 개 떡살 무늬를 담았지요. 천대받으니까 책이라도 제대로 된 것을 만들자고 고집을 많이 부렸지요. 노력을 많이 한 책입니다. "

전통 떡살 문양을 시대에 맞게 수작업을 하여 세련되고 예술성이 느껴진다. 그 덕분에 그 문양이나 떡살을 쓰겠다고 그를 찾아오는 이들도 많다. 그는 떡살 1000여점을 보유하고 있다.

 

그 분들이 그 무늬를 이용하겠다고 하면 기업이 아니면 그냥 쓰게 합니다. 요새는 벽지나 타일, 포장지 등에 떡살 무늬를 활용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오지요. 우리 전통 무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요.”

현재 담양 대전면 대치리에서 목산공예관을 운영하며 전통공예에서 현대목공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감각과 장인정신으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그는 책을 펴낸 후 떡살무늬를 작품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개 정도 만들어 3년간 27개 작품을 창작했다.

 

명장 김규석의 한길

명장은 산업 현장에서 20년 이상 장기 근속한 해당 분야 최고 수준의 기능인이라는 명예를 얻는 것은 물론 명장 휘장과 일시 장려금 2000만원을 지급받고 명장으로 선정된 뒤 동일 직종 근무 기간별로 매년 기능장려금(87260만원)을 받는다. 김규석 씨는 2000년에 떡살 기능 전승자로 지정됐다가 2007년에 올해의 명장에 선정되었다.

저는 함평이 고향인데 제 할아버지가 나무를 잘 다루셨어요. 할아버지 영향으로 저도 어려서부터 나무를 잘 다뤘죠. 공부를 제대로 하지는 못했지만 경기도의 이름난 풍속조각가 이주철 선생 밑으로 들어가서 나무조각을 기초부터 배웠습니다. 그런데 뭐랄까. 열심히는 했지만 보람을 느끼지는 못했다고나 할까요. 외형을 따라 새기고 하는 일에 그닥 매료되지가 않았어요. 그러다가 광주로 내려와서 이연채 선생님을 만났죠. 저보고 떡살을 하라고 하시기에 처음에는 털어버렸어요. 내가 떡살이나 깎으려고 조각을 배웠냐고 하면서.”

20대 혈기 왕성한 나이였다. 남도음식의 살아있는 역사였던 이연채 할머니 집에 동동주를 마시러 다니다가 할머니가 만드는 떡살을 보았다. 1985년도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거부를 했지만 떡살에 끌렸다

결국 그는 광주시 무형문화재 제7호인 고() 이연채 여사에게 떡살 만드는 법과 떡의 소중함, 떡살 무늬에 담긴 의미 등을 배웠다.

이연채 선생은 남도의 전통음식과 떡살의 산증인이셨어요. 그 분한테서 우리 고유의 음식인 떡의 소중함을 들었고, 떡살 하나하나의 무늬마다 들어있는 깊은 뜻을 배웠지요.”

이연채 선생은 광주시 무형문화재 남도의례음식장으로 지정될 정도로 남도 음식의 대가였고, 떡살과 다식판 제작에 한평생을 바쳐 오다 지난 1994년에 타계했다. 김규석 씨는 이연채 선생의 제자로서 떡살과 다식판을 연구하고 만드는 일뿐 아니라, 전통음식에 대한 뜻도 이어가고 있다. 스승 이연채의 음식 저작권을 관리하며 자료를 정리하고 음양사상을 가미하여 새로이 전통 음식책 지혜로운 우리 음식을 펴냈다.

한편, 떡살은 기능적으로는 단순한 음각일지 모르나 김규석 씨에게는 그 무늬의 의미를 모르고 하는 일이 되니 불편했다. 작은 절편에 박힌 염원들의 의미를 알면 알수록 일이 더 편하고 힘이 났다. 일하는 짬짬이 골동품 가게들을 찾아다니고 박물관에 찾아갔다. 전통문양에 관련된 것들은 탁본을 해두거나 자료를 구하기 시작했다.

워낙 맥이 끊겨있던 분야라 우리 떡살의 기본을 체계화하려면 최소 천 개 정도는 떡살을 만들어야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떡살 하나를 만드는 데 최소 일주일이 걸리거든요. 천개를 만들려면 20년을 잡아야겠더라구요. 그래서 20년을 잡고 시작을 했어요.”

그렇게 20여 년을 계획 잡고 만든 떡살들은 2005소중한 우리 떡살이라는 책으로 담아냈다. 책을 엮어내고 나니 전통음식관련자나 전통문화연구자들뿐 아니라 벽지업체나 디자인업체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문화산업과도 소통이 되는 것이 문양이기 때문이었다.

전통음식이 재조명되던 90년대 후반기에는 떡살이 잘 팔렸어요. 만들면 바로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가 좋았죠. 하지만 2000년도부터는 중국산이 들어오기 시작해서 국적불명의 문양들이 마구잡이로 절편에 찍히고 있는 형국입니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막 찍어서 만드는 거죠. FTA만 무서운 것이 아니에요. 해마다 콘테이너로 엄청난 떡살이 들어와서 우리 제사상에 올라가는 절편에 무늬를 찍어내는 데 그걸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게 심각하게 생각 안 되십니까? 차라리 아무 것도 안 찍던지, 이 시대의 염원을 담으면 모를까 우리 문화가 완전히 번지 없는 주막이 돼버렸어요.”

기능을 익히기보다는 의미를 좇아서일까. 고집스런 장인보다는 절개 있는 선비 같다. 20년 공을 들여 떡살재현의 과업을 마치자마자 그가 매달리는 작업이 또 있다. 생활 곳곳에서 쓰였던 다양한 문양들을 재현하는 작업이다.

능화판이라고 있거든요. 책표지를 만들 때 썼던 나무 문양이에요. 시전지판은 선비들이 편지지를 만들던 목판입니다. 주로 매화나 난이 그려져 있는데 오방색 먹을 판에 묻혀서 찍어내면 아름다운 편지지가 됐죠. 연애편지를 쓸 때 꼭 시전지판이 필요했겠지요. 보판은 천에 찍는 목판인데 옷을 만들 때 무늬를 집어넣는 데 쓰였죠. 무늬를 언어처럼 사용했던 시절이라 문양들이 멋이 대단합니다.”

 

주로 1819세기에 생활에 쓰였던 인쇄기술들을 재현하고 있다. 더불어 이 시대의 정서를 담은 새로운 떡살도 만들어내고 있다. 계사년인 2013년을 목표로 삼은 계획이다.

어떤 사람은 답답한가 봐요. 내일 일도 모르는데 어떻게 십년 이십년씩을 내다보며 나무와 씨름을 하느냐고 해요. 하지만 어쩝니까. 저는 미련한 사람이에요. 공부하면서 하나씩 만들어 갈 수밖에 없잖아요. 세월의 검증을 거쳐서 남은 문양들이야 재현이 더 쉽지만 세월 속에서 사라진 것들의 기법과 의미를 찾아내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떡살은 무늬가 아니라 편지

떡살은 떡을 아름답고 먹음직스럽게 만들어줄 뿐 아니라 만드는 사람의 기원이나 소망까지 담고 있다.

생일 떡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국수나 거북무늬를 쓰고, 혼례 땐 다산을 상징하는 석류나 대추, 포도문양을 새기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떡살 명장 김규석 씨는,

떡살은 그냥 무늬가 아니라 편지였어요

라고 말한다. 떡에 꼭꼭 눌렀던 무늬마다에 구구절절한 사연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서툰 한글로 학교라고 새긴 떡살 보신 적 있으세요? 자동차 모양을 그리고는 그 옆에 자동차라고 써넣은 떡살도 있습니다. 아무런 무늬도 새기지 않고 그냥 눌러 떡을 뺀 민무늬 떡살도 있어요. 학교 떡살은 너무 학교에 가고 싶었던 소녀가 새긴 것일 테고, 자동차가 너무 갖고 싶었던 사람의 마음이 그런 떡살로 남았을 것이고, 민무늬떡살은 살아생전에 너무 불효를 했기에 부모님께 아무 할 말이 없다는 자식의 자책을 담은 제사용 떡살이에요. 그러니까 떡살은 그냥 무늬가 아니라 편지였어요.”

떡살은 그냥 보기 좋은 문양을 찍어내는 도구가 아니라 가슴 속 염원을 새기는 틀이라는 김규석 씨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 사이에는 태극기 문양 떡살들이 많습니다. 미 군정기에는 ‘happy day’라는 영문 떡살도 있었어요. 기본적으로야 삼다(三多), 즉 오래 살고, 잘 살고, 자식 많기를 바라는 염원을 떡살에 새기고, 벽사, 화목, 사후세계에 대한 평안함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기도 하지만 그때그때 소박한 마음들도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김규석 씨가 만든 떡살에서는 전통의 멋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러면서도 현대적인 세련미가 느껴진다. 공을 들여 떡살 재현작업을 마친 그는 다양한 무늬를 재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떡살 무늬를 큼지막한 나무판으로 옮겨 별도의 작품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전통의 무늬를 떡살에만 묶어두지 말고 일상생활에서 활용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그의 소망은 아주 소박하다. 그것은 우리 떡살과 떡살무늬가 일반인들로부터 널리 사랑을 받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책에는 떡살 제작법과 노하우가 소상히 적혀 있다.

 

우리 무늬가 장판과 벽지 등 생활 곳곳에서 소중하게 쓰였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나무를 깎는 일꾼이라고 표현하는 그에게서 명장의 기품과 함께 음식연구가, 풍수연구가의 품세가 묻어난다.

한국의 유산 김은미기자

▣ 댓글 게시판
※ 먼저 로그인을 하신 후에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삭제] 댓글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하위 댓글이 있을 경우 함께 삭제됩니다.
비밀번호  
 
[댓글달기] 작성자 ※ 먼저 로그인을 하신 후에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