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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 방춘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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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 기능 계승자 방춘웅 할아버지

 

4대째 전통옹기를 굽는 금촌(錦村) 방춘웅 할아버지. 왼발로 물레를 돌리며 두 손과 간단한 연장(수레,도개 등)으로, 200여 년의 대를 이어 흙과 함께 살아온 분이다. 다섯 살 때부터 옹기를 만드셨다고 하니, 평생을 옹기와 함께 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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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소리처럼 청아한 소리 나야 좋은 옹기랍니다

김장철에 만난 충남 홍성 갈산토기 대표 방춘웅 옹기장
방춘웅 옹기장이
50L 항아리에 잿물을 치고 있다. 항아리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골고루 잿물을 입히는 과정이다.

 

해마다 김장철이면 설레는 이가 있다. 딱히 대목이라 할 수도 없건만 손과 맘이 바빠진다. “여기에 김치 담아 먹으면 정말 맛있는데.”

 

충남 홍성 갈산토기 대표 방춘웅(71) 옹기장. 33년째 한자리를 지켜온 옹기점에서 만난 그는 찌그러진 ‘B항아리까지 동이 났던 196070년대 김장철을 돌아봤다. 그렇다고 그 시절이 좋았다고 미화하는 건 아니다. 옹기가 숨 쉬는 그릇’ ‘정감 있는 식기로 과학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 건 도리어 요즈음 일이다. 반세기 넘게 옹기를 빚어온 방 대표는 천한 직업이었던 옹기장이가 이젠 예술가 대접을 받는다며 웃었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 숨쉬다. 옹기'를 주제로 아모레퍼시픽에서 주최한 설화문화전 행사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생활밀착형 장인이다. 김치냉장고에 밀려 김칫독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데도, “그래도 김장철인데라며 옹기 빚는 손을 더 바삐 놀렸다.

 

잿물도, 가마도 전통이 최고

 

방춘웅 선생은 서산시 운산면에서 태어나 운산국민학교를 졸업한 직후부터 아버지로부터 옹기 만드는 일을 배웠다. 아니, 더 어렸을 때부터일 것이다. 사실 몇 살 때부터 옹기를 만들었는지 기억을 못한다. 옹기를 만드는 게 업이었던 할아버지·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흙을 만지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운산면에도 옹기마을이 있어 옹기를 파는 장도 정기적으로 섰다고 한다. 서산이나 광천에서는 예부터 새우젓을 옹기에 담아 숙성시켰기에 그에 따른 옹기수요도 엄청났던 것이다.

 

아버지가 일하는 옹기점에서 온 식구가 같이 살았어요. 틈틈이 흙도 치고, 나무도 나르고, 갖은 심부름을 하며 컸죠.”

열다섯 살,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방 대표는 이미 자배기 정도는 혼자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배운 게 그것뿐이니 먹고살 길도 옹기뿐이었죠.”

젊은 시절에는 고향을 떠나 6년간 경기도 파주시 금촌에서 옹기작업을 했다고 하는 방춘웅 선생은 부인도 금촌 작업장 시절에 만났다고 했다. 이미 세상을 달리한 장인어른과 같은 공방에서 옹기를 제작했던 것이다. 스물다섯 되던 해, 한 살 어린 신부와 결혼을 했고, 알뜰한 신부는 차곡차곡 돈을 모았다. 옹기점에서 하자품으로 나오는 항아리를 장터에 나가 팔아 목돈도 챙겼다. 이제 다른 사업을 벌여도 좋겠다 싶었다. ‘옹기 일은 딱 5년만 더 하고 집어치우자고 부부가 의기투합했을 때 아내가 병에 걸렸다. 서울로, 평택으로, 서천으로.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다니며 병을 고치는 사이 모아놓은 돈은 바닥이 났다. 방 대표가 지금껏 옹기 일을 놓지 않은 이유다.

 

방춘웅 선생은 결국에는 좋은 옹기토가 생산되는 고향인 갈산면 동성리에 터를 잡고 전통적인 작업방식을 고수해 질 좋은 옹기를 제작해 오고 있다. 이와 같은 노력의 부산물로 2005년도에 노동부로부터 기능 전승자로 선정됐고 충청남도 관광기념품 대전에 참가해 여러 차례의 입선과 공예품 대전에서 특선을 차지했으며, 20082월에는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 38-1호로 등록됐다.

 

195060년대, 그는 옹기 세월 좋았을 때라고 기억한다. “음식을 담을 그릇이 항아리밖에 없던 시절이어서 만들어만 놓으면 잘 팔렸다고 했다.

 

70년대 중반, 한국의 옹기 산업은 큰 위기를 맞는다. 이른바 광명단 파동때문이다. ‘광명단은 납 성분이 포함된 화학 유약으로, 광명단을 잿물 대신 사용하면 옹기에 반짝반짝 윤이 났다. 또 원래 섭씨 1200도까지 올려야 하는 가마의 온도를 1000도 전후로 낮출 수 있어 연료 절감 효과도 컸다. 하지만 광명단의 유해성이 드러나면서 옹기를 찾는 소비자들이 급감했다.

 

 옹기 그만두려고 막일 하는 데를 기웃거리기도 했죠. 그런데 영 벌이가 시원찮더라고요. 그냥 하던 거 해야겠다, 다시 돌아왔지요.”

대신 독립을 하기로 했다. 80, 지금의 갈산토기 자리인 충남 홍성군 갈산면에서 자신의 옹기점 문을 연 것이다. 원래 전통 옹기마을이었던 곳이어서 100여 년 전 만들어진 전통가마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전통 방식으로 옹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콩깍지 등을 태워 만든 재와 약토, 그리고 물을 섞어 천연 잿물을 만들어 써요. 이 동네 흙이 질 좋은 부엽토여서 약토로 쓰기 딱 좋죠.”

 

전통 장작가마는 사실 자주 사용하지 못한다. 한 번 불을 때면 56일을 가마 옆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손이 많이 가서다. 평소에는 가스가마를 주로 쓰지만 작품을 만들기 위해 1년에 두세 차례 장작가마를 가동시킨다.

 

전통 가마로 구운 옹기에선 뭔지 모를 품격이 느껴져요. 가마 속에서 곶감처럼 빨갛게 달궈진 옹기를 보면 황홀하답니다.”

 

갈산토기마을

 

갈산마을은 지금의 간척지가 생기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가였다고 한다. 예로부터 갈산토기마을은 진흙이 좋아서 토기를 만드는 데 최적의 환경이라고 한다. 특히나 배편을 이용해서 만들어낸 토기는 위로는 인천으로, 아래로는 서천까지 보내졌다고.

 

갈산토기가 위치해 있는 갈산면 동성리에는 현재 2개의 옹기공방이 위치해 있다. 그래서 옹기마을이라고도 불린다. 방춘웅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마을에 다섯 개 이상의 옹기공장이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7·80년대의 플라스틱 붐에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해 지금은 두 개의 공방이 옹기마을의 명맥을 잇고 있다.

 

가볍고 쓰기편한 플라스틱 용기들이 팔리기 시작하면서 옹기를 구워 식솔을 먹여 살리는 게 정말 힘들었었어요. 그런데 배운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게 옹기 만드는 일 말고 또 뭐가 있었어야지... 어려워도 참고 하는 수밖에. 정말 힘들었을 때에는 논에서 자라는 녹사풀이라는 게 있는데, 그 풀을 뜯어다가 죽을 쑤어 먹기도 했으니까.”

 

그래도 방 대표는 옹기 판 돈으로 23녀를 대학 공부까지 다 시켰다.

“56년 동안 옹기를 만들면서 힘든 일도 참 많았고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보면 보람도 크지만, 내 유일한 자랑이 있다면 아들, 딸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운 게 자랑이라면 자랑이에요. 요즘은 대학 보내는 게 우스운 시대지만 그때만 해도 어디 그랬나. 옹기 만들어서 5남매 모두 대학까지 가르쳐 지금은 모두 제 각기 직업을 갖고 잘 살고 있으니까…….”

옹기가 꽤 팔리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옹기는 참 신통한 그릇이다. 공기는 통하게 하고 물은 통과시키지 않는 미세한 구멍이 있어, 담긴 음식을 잘 익게 하고 오랫동안 보존해 주는 역할을 한다. 김치뿐 아니라 된장·간장·젓갈 등 발효음식의 저장용기로 안성맞춤인 이유다. 또 쌀·보리 등 곡식도 옹기에 넣어두면 다음해까지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다. 옹기를 가마 안에 넣고 구울 때 나무가 타면서 생기는 검댕이가 옹기에 붙어 방부성 물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옹기는 물항아리로도 제격이다. 옹기에 물을 담아 보관하면 냉장고에 보관한 것처럼 시원해진다. 옹기가 수분을 빨아들인 뒤 몸체 밖으로 기화를 시키면서 기화열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 대표는 옹기로 참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독이나 시루·뚝배기·약탕기 등은 물론 굴뚝과 기와까지 옹기로 빚었다. 심지어 거름을 옮길 때 사용하는 똥장군도 옹기로 만들었다.

밥그릇이나 커피잔도 만들어 놓으면 누군가 사갔어요. 쉴 새 없이 손을 놀려 이것저것 만들었죠.”

유행도 탔다. 90년대 웰빙 바람 덕이 컸다. 아파트로 이사오며 장독을 처분했던 도시 사람들이 30L짜리 작은 장항아리를 찾기 시작했고, 쌀독으로 옹기 독이 인기를 끈 적도 있었다. 김치냉장고용 사각 옹기로 한때 재미를 봤고, 요즘엔 효소 담근다며 매실철에 사가는 주부가 많다.

 

방 대표의 갈산토기엔 또 다른 히트상품이 있다. 바로 체험학습이다. 2001년 둘째 딸 유정(44)씨가 앞장서 시작한 체험학습 프로그램은 이제 연 1만여 명의 학생이 찾아올 만큼 인기다. 방 대표는 체험 프로그램이 옹기 홍보에 큰 도움이 된다.”며 흐뭇해했다. 그리고 옹기제작을 전수중인 둘째 아들 방유준 씨의 도움도 컸다.

 

방 대표의 사업장엔 작업장과 체험장·판매장, 그리고 살림집이 모두 함께 있다. 몇몇 도매상에 물건을 넘겨주는 걸 빼면 모두 이곳에서 판매를 한다. 서울 한복판 갤러리에서 전시회까지 치른 그의 작품이지만 값은 여느 생활옹기와 별다르지 않다. 30L짜리 항아리 값이 5~12만원 정도다.

 

방 대표는 좋은 독 고르는 법을 귀띔한다.

수박 고를 때처럼 두드려 보세요. 종소리처럼 청아한 소리가 나야 좋은 독이에요. ‘하며 소리가 끊긴다면 덜 익은 거죠.”

그랬구나. 그래서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항아리 배를 툭툭 때려보면서 좋은 항아리를 가려내는 거였구나.

방춘웅 선생은,

마음이 불편하면, 옹기도 마음에 안 들게 나오지…….”

라며, 좋은 옹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50년 넘게 옹기를 만들어 오고 있지만, 여전히 흙 앞에서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단다. 반 세기를 넘겨도 쉬운 일이란 없는 것이로구, 오히려 더 어려워지는 거구나.

한국의 유산 이소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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