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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통 장승제작 기능전승자 이가락





장승과 솟대

장승과 솟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자면, 장승과 솟대는 나무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아무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장승은 천차만별의 모습을 하고 있어 그것을 만드는 장인의 안목이 도드라진다고도 볼 수 있다.

 

무섭거나 악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엄숙하고, 엄숙한듯 하면서도 우스꽝스럽고, 우스꽝스러운가 하면 은근히 무서운 그 얼굴, 거기엔 인간의 희로애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보편적인 심성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굉장히 과장되거나 생략되거나 희화화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장승은 오랜 옛날부터 한국의 독창적이고 상징적인 문화양식으로 전해 내려왔다. 마을의 입구나 길가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하거나 이정표의 구실을 하는가 하면 잡귀나 질병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장승은 그런 이유로 지금도 많은 수난을 겪고 있다. 어느 종교에서는 우상 숭배라는 이유로 우리의 전통 문화 양식인 그것을 훼손하고 그 문화를 훼절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편협한 종교관에 다름 아니다.

 

솟대 역시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의 생활 속에 있었다.

 

삼한(三韓)시대에 신을 모시던 장소인 소도(蘇塗)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는데, 농가에서 섣달 무렵에 새해의 풍년을 바라는 뜻에서 볍씨를 주머니에 넣어 장대에 높이 달아 매어 이 볏가릿대[禾竿]를 넓은 마당에 세워 두고 정월 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농악을 벌이는데, 이렇게 하면 그 해에 풍년이 든다 했고, 또 민간신앙의 상징물인 장승 옆에 장대를 세우고 장대 끝에 새를 나무로 깎아서 달기도 하였다는 데서 보듯이 솟대는 장승과 함께 우리의 생활

 

문화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조상과 나를 잇는 얼이 아닌가.

 

이가락과 장승

어릴 때부터 나무를 좋아했고 재주가 있었다. 부모님 몰래 팽이를 만들며 유년시절을 보냈고, 1때 장승을 보고 그 신비로움에 빠지게 되었다. ‘언젠가는 꼭 만들어 봐야지하는 그 때의 다짐을 지켜낸 그는 이제 세계 곳곳에서 장승을 세우며 우리 문화를 알려내고 있다.

어렸을 때의 꿈을 실현하고 지금 세계 최고가 되기까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취미생활이었으나 1979년 인제에서 목공예공방을 만들면서, 작품들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80년대 중반부터 수집한 장승에 대한 책과 목공예 연장들은 현재 1200여점에 이르렀다.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96년 서울 인사동에 작품을 전시하면서 부터였다. 전통 문화의 거리로 잘 알려진 인사동 거리에서 직접 깍는 것도 보여주며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귀중한 우리 문화를 알려 나갔다.

 

이후 2001년 노동부에서 기능전승자 지정을 받게 되면서 그의 열정은 증명되었다.

 

서울 예술의 전당 국립전시회를 비롯해 세종문화예술회관에서는 전통 분야로는 최초로 한달 동안 청계천 준공기념 특별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밖에도 국립민속박물관과 전국의 국립박물관을 순회하며 강의를 다니며 프랑스 파리, 이태리, 러시아, 중국, 독일 등지에서 장승 전시를 비롯한 장승공원까지 만들고 있다.

 

장승은 동방의 나라 한국의 역사가 빚은 몰골입니다. 한국인의 희로애락을 담은 얼굴이 장승의 모습입니다. 나는 장승이 아닙니다.그러나 내가 한국인이듯이 장승은 내 얼굴일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장승을 깎고있는가 봅니다라고 이가락은 말했다.

한국의유산 이소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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