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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야철도검 이상선





..정신수양의 도구

우리 옛 선인들에게 있어 생명과 명예를 걸만큼 신성한 것이었던 검(). 심지어 검신(劍申)이 있다고 믿었고 이는 신앙적인 경지까지 승화했다. 신성시되었던 검 중 더욱 특별한 조선시대 인검(寅劍), 그 중 영험한 검이 있기에 그것이 사인검(四寅劍)이다. 호랑이를 뜻하는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양기의 초 고조에 만들어지는 보검인 인검은 살상이 아닌 의식이나 의장용 칼이었다. 상서로운 기운이 도는 시간 쇳물을 녹여 사액을 물리치고 새 기운을 받아들여 국가의 위난을 물리치고자 하는 의지와 염원으로 만들어진 칼. 검의 표면에는 27자의 금입사로 이루어진 28수의 한자와 이면의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한 별자리를 새겨 용맹과 영험한 신비를 나타내고자 했는데, 칼 하나에도 인간을 위한 마음을 담고 혼을 연마하는 정신수양의 도구로 생각했던 우리 민족의 정서와 문화가 녹아 있다.

 

양녕대군 18대손, 칼에 미치다

매년 노동부에서 실시하는 기능 전승자 선정은 민족 전통의 고유기능 보유자를 발굴, 선정하여 기능 전승지원금을 지원함으로써 기능을 계승 발전시키며, 기능 보유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노동부는 각 부문마다 민족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는 명장들을 발굴하여 2007년도 기능 전승자를 선정 발표하였다. 이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전통야철도검 부문 기능전승자로 선정된 고려왕검연구소 이상선 소장. 왕가(王家)의 자손으로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왕의 칼 사인검(四寅劍)을 비롯한 전통 검 만들기만을 고집해온 그는 기능 전승자 선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이상선 소장이 운영하는 고려왕검연구소에는 그의 칼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종종 찾아온다. 그들은 그가 만든 칼을 만져보고 직접 휘둘러보며 감탄을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손님들이 찾아오면 그는 칼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다반사다. 그만큼 이상선 소장의 칼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그가 처음 칼을 접했던 건 열여섯 살 때였다.

제가 조선소 3대 태종의 맏이인 양녕대군의 18대손인데 16살 때 형님을 따라 종묘제례에 가서 그곳에서 처음으로 우리 전통 검을 보았습니다. 당시는 그것이 사인검이라는 사실도 몰랐지만 우리 검의 매력에 운명처럼 끌려 검 만들기에 뛰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 전통 검 제작의 맥이 끊겨져 제작 방법을 배울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 전국을 돌며 조금씩 모자이크 조립하듯 제작 방법을 배웠습니다. 조선시대 문헌을 모두 찾아봐도 사인검 제작에 관한 문구는 거의 없어서 사인검 제작에 더 큰 어려움을 느꼈지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결국 사인검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처럼 사인검을 깊이 파고든 것은 일본도로 널리 알려진 일본도는 백제가 전파한 기술로 원래 우리나라의 검이지만 오늘날은 일본의 검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문화를 일본에 송두리째 빼앗긴 것입니다. 일본은 명맥이 계속 유지되어 왔지만 우리나라는 명맥이 끊어졌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백제도()를 가지고 일본하고 맞선들 이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사인검은 일본에 뺏기질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 이런 사인검을 발전시켜 일본도를 능가하는 검을 만들겠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사인검에 깊이 파고 들 수 있었습니다.”

왕손인 그가 대장장이 일을 배운다고 할 때에는 집안의 반대도 심했다.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 3형제를 키웠던 어머니는 공부는 하지 않고 대장간으로 돌아다니는 그를 무척 혼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칼에 빠져 버린 그를 돌아서게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결국 초등학교만 졸업하고는 집을 나와서 칼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정작 칼을 만드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칼은 무척이나 복합적인 예술이다. 칼날을 만들려면 쇠를 다뤄야 하고 세공을 하려면 금과 은도 다뤄야 한다. 칼집과 손잡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나 가죽도 다뤄야 하고, 매듭에는 천이나 비단에 대한 기술도 필요하다. 원하는 칼을 만들기 위해서 그는 이런 모든 분야를 섭렵해야 했다. 본격적으로 칼을 만들기 위한 준비 과정만 15년이 걸렸다.

그 당시 우리나라엔 도검 만드는 공장이나 공방 같은 것이 없었어. 그래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부분적으로 배웠지. 칼집 만드는 건 목공소 가서 배우고 날 만드는 건 대장간 가서 배우는 식이었지. 월급이 적어도 상관없었어. 밥만 먹여주고 잠만 재워주면 괜찮았거든. 그 정도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지.”

 

칼 이외의 삶은 없었다.

평소에 잘 울지 않는다는 이상선 소장이 한번 크게 울었던 적이 있다. 바로 도검제조허가를 받았을 때이다. 15년간의 노력이 비로소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고생한 가족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길이 보이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날개를 단 것만 같았던 그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칼만큼이나 좋아하던 오토바이를 타다가 차와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온통 피투성이인 상태여서 죽은 줄 알고 거적때기를 덮어놓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목을 크게 다친 그는 지금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이 사고는 이후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사고 때문에 목을 다치고 나선 호흡하는 게 무척 힘들더라고. 조금만 크게 움직이면 숨이 가빠서 아무것도 못할 정도였거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공장 지하실에서 칼 만드는 일밖에 없었지. 하늘이 나한테 딱 그만큼의 숨만 남겨둔 거야. 그때 칼 만드는 일이 내 소명이구나 싶었지.”

이후 이상선 소장은 더욱더 전통도검 제작에 매진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맥이 끊긴 우리 전통도검을 계승하고자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도검제작법에 관한 문헌도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시작한 일은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한 두 자루 남아있는 전통도검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통상감기법과 매듭법도 연구하며 최대한 잊혀 진 우리 전통도검을 완벽히 재연하기 위해 애썼다. 현재 그의 연구소에 마련된 전시실에는 언월도, 협도, 죽도, 환도부터 작은 소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통도검이 재연되어 있다. 그는 전통도검에 대한 뛰어난 기술을 인정받아 지난 1999년에는 경기대박물관에 전시될 27점의 도검과 창, 철퇴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1만여 자루의 칼을 만들어왔다. 첫 공방이었던 인천에서의 생활과 지금 문경의 폐교에 이르기까지 23년의 삶이었다. 일을 배우기 위해 떠돌던 시간까지 합하면 무려 38년의 세월을 칼에만 바쳐 온 것이다. 천 자루의 칼을 만들어도 똑같은 칼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이상선 소장. 그의 작업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바람을 몸으로 받으며 쇠에 숨을 불어넣고 있었다. 쇠를 두드려 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쇠에 숨을 불어넣어 칼의 모습을 찾아내고 있었다. 그는 그의 칼처럼 진중하고 묵직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뒷모습은 오랜 세월동안 스스로를 두드리고 두드려 찾아낸 아름다운 장인의 모습이었다.

그동안 전통 검에 대하여 국가와 사회에서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서운한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이렇게 기능전승자로 선정되어 그동안 가졌던 서운한 감정들이 해소 되었습니다. 앞으로 전통 검 제작에 더욱 매진 할 것이며 제대로 된 전통 검 박물관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전통 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달 하고자 합니다. 또한 우리국민들에게는 우리나라 전통 검을 사랑해 달라는 부탁을 꼭 하고 싶습니다. 국민들이 다른 제품은 국산품 애용을 많이 하고 있지만 칼에 대해선 일본도에 빠져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도도 백제 문화권이긴 하지만 우리 전통 검을 등한시 하면 우리나라 도검시장의 발전을 기대 할 수 없습니다. 일본과 우리는 같이 뜀박질을 하다가 우리는 중도에 잠을 자다가 다시 일어나 달려가고 일본은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 달려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현재 격차가 벌어져 있지만 뒤에 쳐져 달려오고 있는 것에 관심을 주지 않으면 달리다 주저앉게 됩니다. 국민들의 더 큰 관심만이 일본과의 격차를 줄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한국의 유산 장선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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