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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승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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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은 전통 목가구나 궁궐, 사찰, 한옥 등과 같은 건축물에 붙여서 나무가 뒤틀리는 것을 막고 이음새가 벌어지지 않게 고정하거나 문을 여닫기 위해 만든 금속제 장식이다. 먹고 살기 어렵던 1970~80년대만 해도 많은 이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장석제작은 현대화 물결과 함께 하나 둘 떠나더니 이제는 전국에 10여 명의 기능전수자만 남았다. 배우려는 이도, 가르치는 이도 힘에 부쳐 점점 쇠퇴되어가고 있는 우리전통의 기술 장석제작. 양현승 전승자를 알게 된 것은 사라져가는 우리의 전통예술인 장석의 산 증인을 만난 것이나 다름이 없어서 마음까지 뿌듯하게 했다.

 

오르막의 좁은 골목을 몇 번 돌자 아현공방이라는 작은 글씨가 보였다. 문을 열자 7~8평 남짓한 공간에 쇠를 가는 소리와 라디오소리가 시끄럽게 뒤엉켰다.

공방이 이래요. 지저분하고.... 직접 손으로 본을 뜨고 쇠를 갈아내서 모양을 내야 하거든요. 그렇다보니까 늘 이렇게 지저분해요.”

협소한 공간 가득한 쇠 조각과 공구들이 열악한 작업현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시끄러운 작업공간을 벗어나 인터뷰는 그의 안채에서 진행됐다. 그의 손을 거쳐서 완성된 작품들이 가득한 안채는 시대를 되돌려 놓은 듯했다.

 

가장 중요하면서 하대를 받는 장석전승자

 

우리가 사용하는 가구나 건구의 제일 마지막 마무리가 장석이죠. 가구를 제아무리 잘 짜 놓아도 장석이 없으면 모양새가 안 나거든요. 문도 마찬가지로 잘 만들었다고 해도 경첩을 달아야 비로소 활용가치가 있는 것이고요. 건축물도 지어 놓고 문을 달고 모양을 다듬어주어야 멋진 건축물이 되는 거잖아요. 그 마지막을 마무리해주는 것이 어찌 보면 장석이에요. 그런데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가장 하대를 받는 것이 또 장석이라고 보면 돼요.”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우리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장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리성의 기능, 거기에 모양과 컬러를 입히는 장인의 손길은 별 볼일 없던 나무 조각과 쇠 조각의 어울림으로 가치를 창조해내고 있었다. 작품을 만들 때마다 장인들의 혼을 넣은 정성이 없다면 불가능할 터.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는 작품에 양보한 거친 그의 손마디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훌륭한 목수가 잘 짜서 맞춘 제품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뒤틀리는 현상이 나타나요. 그게 나무의 특성이니까요. 그걸 방지하려면 장석으로 모서리를 잡아주고 거기에 모양도 만들고 색을 입히면 이렇게 멋진 작품이 되는 거지요.”

장석은 당시의 정서와 생활상의 염원 등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지체 높은 양반들이 사용하던 것을 서민들의 생활에서도 사용되기 시작 한 것이다. 당시는 지금처럼 합금에 옷 칠을 한다든지 금박, 은박 등을 입혀서 모양을 냈다기보다는 자연그대로 철을 사용했다. 당시의 가구들을 보면 시우세(장석에서 부르는 철)를 그대로 쓴 흔적이 보인다. 그러다가 시대가 발전해오면서 주석이라든가 구리, 아연 같은 것으로 합금해서 황동 색깔도 내고, 은색도 냈고 몸에 좋다는 옻칠을 해서 고풍스러움을 더하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색상이 변하는 것도 막을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51년을 오직 한 길을 걸어온 장인정신

 

5.16쿠데타가 일어나던 해인 1961년에 장석분야에 입문한 양현승 전승자는 51년 동안 오직 한 분야에서만 일해오고 있다. 당시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전남 화순이 고향인 그는 농지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로 향했다.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고등학교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지금이야 적성에 맞는 미래개척을 위해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노력하지만 그때 우리나라의 환경은 배라도 곯지 않으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다행히 외삼촌이 장석을 만드는 사업을 하고 계셨기에 취업은 어렵잖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월급 한 푼 주지 않자 같이 일하던 형이랑 야밤에 단봇짐을 싸서 진주로 야반도주라는 것을 했다. 그렇게 다시 잡은 일터에서는 그나마 조금씩이라도 봉급을 받을 수 있었지만 군대의 장벽은 다시 막막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겨주었다고.

 

당시는 군 복무기간이 길었어요. 제대할 때가 되니까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닌 거예요. 도대체 뭘 해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죠. 그래서 군대 제대하고 나서 부모님을 먼저 뵌 것이 아니라 같이 공장에서 일했던 선배를 찾아가 부탁했더니 마침 자리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취직이라고 해봐야 큰 회사가 아니고 한두 명 일하는 공장이지만 우선 밥 먹는 건 걱정 안 해도 되니까 안심이 됐죠. 당시는 먹는 게 제일로 큰 걱정이었으니까요.”

 

어렵사리 구한 직장에서 성실히 일했던 덕에 돈도 조금 모았다. 안정된 생활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이른 나이에 아내를 만나 결혼까지 하고 나니 책임감은 더 커졌다. 아내의 격려로 맨 먼저 인사동에다 공방을 차렸다. 운이 따랐던 건지 공방을 차리자 복고풍이 유행하면서 고가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사업은 꽤나 괜찮았다. 직원도 7~8명으로 늘어났다. 사업이라는 게 이런 건가 하는 자신감도 생겼다. 자만은 곧 자멸이라고 했던가? 대량생산의 물결은 가격경쟁력에서부터 마케팅까지 사업가들이 시장을 휩쓸었다. 좌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격려가 욕심을 내 놓게 만들었다.

 

사업은 욕심만 앞선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그릇도 따라줘야 하더라고요. 내 그릇은 사업가가 아니라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혼을 넣어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란 걸 그때 느낀 거죠. 충분한 손재주가 있고 일에 빠지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드는 장인정신이 있는데 왜 사업을 했던가? 이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량생산도 좋고 돈도 좋지만 사람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야 알짜적인 작품이지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면 그게 무슨 작품이에요. 그때 잘 선택했기에 이 나이에도 일을 하고 있는 거지죠.”

 

전통이라는 것은 결국 그것을 모방해서 창의성을 발휘하고 옛것에 가장 근접하게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옛것의 예술성에 감탄하고 따라가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주 작은 것 하나에도 의미와 지혜를 담았던 선조들의 지혜는 첨단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장석 하나만 봐도 그렇다. 자물통에 유난히 물고기나 박쥐모양이 많은 이유는 눈을 감지 않고 잠을 자는 물고기와 야행성인 박쥐가 집안에 도둑이 들지 않도록 잘 지키라는 뜻과 다산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전통가구들은 당시의 시대상과 지역의 특징도 강한데 그 이유는 당시의 물류이동이 지금처럼 용이하지 않았기에 지역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평생을 작품 활동을 해왔으니 어느 작품 하나 마음에 안 담았으랴마는 콕 짚어 하나만 말해달라고 했더니 경기반닫이란다.

 

전승공예대전에서 장려상을 받은 작품인데 남에게 팔기 아까울 정도로 공력을 들였거든요. 대상을 받을 줄 알았는데 장려상을 받으니까 정말로 서운터라고요. 젤로 마음에 드는 제품이에요. 한 달 정도를 날밤을 세워가면서 만들었는데 자식 같지요. 여기 있는 작품들이 하나 둘 주인을 찾아갈 때면 자식 결혼시키는 것 같아서 밤잠을 설치곤 해요.”

 

대량생산의 문제점은 획일화다. 차별성과 독창성보다는 어디서든 똑같은 것을 구할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여기에 비춰볼 때 수작업의 매력은 바로 독창성이다.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흉내는 낼지 몰라도 똑같이 만들지는 못하는 작품. 그것이 수작업의 매력이다.

 

아쉬운 건 국가적인 정책이 미미해서 배우려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현재 국가정책은 계승자에게 전수를 하게 되면 한 달에 100만원씩 3년간 지원된다. 100만원 중 80만원은 재료비, 20만원은 계승자 지원비다. 그렇다보니 배우려는 이도 힘들게 가르치려는 이도 거의 없다. 그나마 양 전승자에게는 30년간 전수를 받아온 계승자가 있고 10년 전부터 둘째 아들이 전수를 받아오고 있다. 몇 년이 지나면 영원히 사라져버릴 위기에 있는 우리의 전통예술이 전수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양 전승자에게는 뿌듯한 행복이다.

 

그는 얼마 전 서울시 문화재청에 무형문화재 신청을 해 놓은 상태다. 70살이 넘으면 그나마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니 서둘러야 한다는 협회차원의 재촉을 받아들인 거란다.

 

평생을 돈보다는 옛것을 계승하고 지켜나가는 데 담아온 양 전승자. 그에게 하루는 작품에 혼을 담아내는 것이기에 배고픔도 잊을 때가 많단다. 우리의 미래는 전통이라고 생각하기에 끊임없이 담아내고 닦아서 보존하는 것을 게을리 할 수 없다고. 그의 손끝에서 완성된 아름다운 작품들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 마음에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졌다.

한국의 유산 이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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