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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먹에 인생을 건 경주먹장 유병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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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 기술로는 최고가 되겠다는 집념으로 오늘 일궈

외길 반세기의 특별한 삶을 살아 온 인물, 60여년에 가깝게 먹을 만들어 온 경주의 무형문화재 먹장(墨匠) 덕산(德山) 유병조(兪炳肇, 71) 선생을 만나 숱한 고난 속에서도 먹 만들기에 전력하는 등, 외길 인생을 살아 온 내력과 장인으로서의 철학 등을 들어 봤다.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334번지, 가내 수공업 방식으로 전통 먹을 만들고 있는 덕산 선생은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뒤인 14세부터 호구지책으로 먹 만드는 기술을 익히기 시작한 게 인연이 돼 57년째 먹을 만드는데 매달린 별난 인생을 살고 있는 장인(匠人)이다.

 

그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200911월엔 경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으면서 지역의 먹장으로 자리 잡은 뒤 칠순이 넘은 나이인 지금도 한국에서 제일가는 가장 훌륭한 먹을 만드는 장인이 되고자하는 일념으로 먹 만들기에 땀을 흘리고 있다.

 

먹을 만들기 시작한 동기

저는 일제 강점기였던 1940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해 6세 때인 19458월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귀국했죠. 먹을 만드는 일과의 인연은 광복 뒤 일본서 귀국해 어려운 처지라 우선 먹고 살기 위해 기술을 배우게 되면서 시작됐어요.”

 

그의 할아버지 고향은 청도군 운문면이었으나 일본서 귀국하면서 광복 전 큰 할아버지가 사시던 경주군 산내면 대현리로 와서 정착했다고 한다. 조모님과 부모는 물론 삼촌과 고모 등 일가 11명이 단체로 귀국했다. 귀국 초기특히 일본서 돌아가신 조부님의 유언을 지키느라 많은 어려움도 겪었단다.

광복 직전 일본서 타계하신 조부님은 죽더라도 반드시 화장해서 뼈라도 한국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부친은 일본서 귀국하면서 화장한 뼈 봉지를 안고 돌아와 조부님의 유언을 지켰다.

 

51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산내서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했으나 먹고 살기가 너무 힘겨워 공부는 포기한 채, 당시 울산의 먹() 만드는 공장에서 기술자로 일하던 삼촌을 의지해 14세에 울산의 먹 제조공장에 기술을 익히려 찾아가게 된다. 그게 인연이 돼 오늘의 먹 장인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일본서 귀국해서 농촌생활을 하면서 살 때는 너무나 어려워 여름이면 산의 도토리를 주워서 연명을 하다시피 살았어요. 일본말만 할 줄 아는 저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우리말을 몰라 애를 먹었답니다. 어린 몸에다 도토리만 먹었더니 머리털이 모두 빠지는 증세까지 보이자 친구들은 보기 흉한 저를 보고 놀려대기가 일쑤였으며, 졸업 후에도 논밭이 없다 보니 농사일도 할 수 없었어요. 바로 당시 울산 태화동에서 셋째 삼촌이 근무하던 먹 만드는 공장에 가서 먹 제조기술을 익히기 시작했어요.”

 

당시 울산에서도 6·25 당시 황해도에서 피난 온 먹 기술자 한 분만이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공장을 운영했으며 먹을 만드는 기술은 아주 간단할 정도였다. 소나무 그을음(松烟)과 찰진 황토를 섞은 다음 아교 등을 배합해 쇠틀에 찍어서 먹을 만들었다.

 

그나마 당시엔 필기도구가 마뜩하지 않아 먹은 잘 팔리는 편이었다. 6~7년 동안 일했으나 한 번도 월급을 받아보지 못한 채 숙식만 해결하는 정도였다. 육군에 입대를 했으며 만기 제대 후 다시 먹 기술을 계속 익힌 뒤 1972년인 32세 때 산내면으로 귀향해 드디어 독립해서 먹 공장을 차리게 되었다.

 

말이 독립한 먹 제조공장이지 고생은 계속됐죠. 70년대 초에도 산내면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내일 2리에 위치한 공장은 자가 발전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어요. 발전기 소리가 너무 커서 이웃주민들이 소음에 시달려 살 수 없다고 항의하는 바람에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는지 아무도 모를 거예요.”

 

할 수 없어서 2년 뒤엔 전기가 있는 건첩읍 조전리로 이사를 와서 공장을 운영하다가 10여년 전에야 겨우 현재 살고 있는 송선리의 주택 겸 공장 터를 장만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

 

비록 10대 당시부터 먹을 만드는 기술은 익혔다지만 당시엔 주먹구구식으로 먹을 만들었을 뿐 기술이 향상된 먹은 엄두도 못 냈으며 수십년 동안 연구를 해서 생산한 먹인 데도 판로가 너무 미미해 호구지책일 따름이지 장사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현대인들이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양질의 개량된 먹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여 만들고 부수기를 수백 번 수천 번 거듭한 결과 현재처럼 다른 조묵사(造墨社)보다 질이 좋은 먹을 만드는데 성공해 경북도 무형문화재가 되고 먹장이 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먹의 종류와 기술

먹은 소나무의 그을음인 무연(無煙)과 기름류에서 얻는 유연(油煙)등 두 종류가 있는데, 두 종류의 그을음에다 아교와 향을 잘 배합해 만드는 게 기본 방법이랍니다. 앞에서 말한 네 가지 재료를 어떻게 잘 배합하는가에 따라 좋은 먹이 나오느냐 아니냐가 결정되는 것이며, 이름도 무연먹이냐 유연먹이냐가 결정되는 것이죠.”

 

그는 30여년 경륜이 붙으면서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먹을 한 번 만들어 보자, 아니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아주 좋은 먹이 생산되는데 왜 한국에서는 양질의 먹을 만들 수 없느냐라는 의문을 스스로 제기하면서 좋은 먹을 만드는데 연구를 거듭했다. 지난 2009년에는 유리판 위에서도 잘 갈리는 그만의 기술인 먹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이 먹은 중국과 일본에도 없다.

 

거기다 먹에는 별도의 향이 들어가야 양질의 묵향(墨香)이 나온다. 일본서는 좋은 먹에서 나오는 향이 50~60년이 지나도 난다고 한다. 그는 좋은 향을 만들기 위해 직접 산천을 찾아다니며 독특한 향이 나는 나무와 풀을 채취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만든 먹에서만 독특한 향이 나게 되며 먹 이름도 송연먹’, ‘송향먹’, ‘송선먹’, ‘문향먹’, ‘주먹먹’, ‘채색먹’, ‘옥로향먹등 다양하다.

 

제가 만드는 먹은 전국의 서예가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있어 다른 지방엔 판매하지 않고 오직 서울의 인사동 동헌필방 등 몇 곳에서만 판매하고 있어요. 거듭 강조하자면 50년이 휠씬 넘게 먹과 씨름했지만 아직도 경제적으로 여유는 불구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가족들을 너무 고생시켜서 미안한 마음이 태산 같아요.”

 

 

가업을 잇는 후손들, 앞으로의 계획

지난 세월동안 수십 번이나 먹 만드는 일을 때려치울까도 생각했지만 그 때마다 한번 시작한 일인데 끝장을 봐야 할 게 아닌가, 생각했다. 이 분야에서는 스스로가 일인자가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의 집념 하나로 오늘까지 온 것이다. 결국 최선을 다하면 결과가 좋아진다는 생각이다. 때문에 그는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난 60여년의 세월을 오직 먹 만들기에 매달려 살아온 덕산 선생은 현재 경주 먹장이란 호칭도 얻었으나 계속 정진해서 더 훌륭한 장인으로 우뚝 서고 싶다고 다짐한다.

젊어서 고생을 너무 많이 해 건강이 다소 좋지 못한 그는 칠순을 넘은 나이인 지금도 무연을 만들 나무를 채집하고 향 원료를 찾아 산천을 헤매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자식 21녀 가운데 장남과 장녀 등 남매가 부친의 기술을 익혀 가업을 잇겠다고 나서고 있어서 마음에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한국의유산 이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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