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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령 귀금속 장인 이정훈 선생




궁중 액세서리 재현하는 외길 50

여기, 평생을 보석 가공에 바친 사람이 있다. 10년 전부터는 사라져 가던 전통 세공법을 복원, 가락지뿐 아니라 비녀·뒤꽂이 등 명맥이 완전히 끊긴 장신구들까지 새롭게 탄생시켰다. 50여 년을 고집스럽게 한길을 걸어온 그의 삶은 우리나라 귀금속 역사와도 맥을 같이한다. 지난 2003년 세공조각 기능 전승자로 선정된 이정훈 선생이 그 주인공. 그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세공 기술자 중 최고령이자 최고 기술자로 꼽힌다.

 

서울 태생으로 1948년 중구 충무로에 있는 은방공장인 동광양행에 취직했다. 10대 초반으로 손재주가 남달라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가난을 면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점차 전통 세공의 뛰어남에 매료됐다. 당시 은세공 기술로 이름 높았던 김진용·이남재옹을 스승으로 모시고 금·은의 채광, 분석, 채취, 도금 등을 익혔다. 60년대 초에는 세공기술인의 모임인 남우회를 만들었다. 찬란했던 세공기술의 맥을 잇고 활성화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다. 1968년 김포공항 미군부대 안 하비숍(Hobby Shop)에서 국내 첫 귀금속공예 전시회를 열었다. 그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영국의 드비어스사가 주관한 국제 다이아몬드 창작대회에 작품을 내놓기도 했다.

 

벽화나 고찰의 문살, 민화 등에 남아있는 문양을 세공품에 응용하는 데 정성을 들였다. 2000년에는 전통문양 박쥐를 은가락지에 다시 부활시켰다. 한자로 박쥐복자와 복복() 자의 발음이 같아 옛 공예품에 박쥐문양이 많았으나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의미 있고 독특한 문양의 은가락지 또한 화제가 됐다.

서울 은평구 녹번동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는 그의 작업실 겸 전시실 태광 공방을 찾은 날, 그는 은가락지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직접 만들어 평생을 함께해 온 낡은 작업대와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각종 공구들은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전시된 작품들을 일일이 보여주고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는 전통을 지키는 사람 특유의 자부심과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이 넘쳤다.

요즘 사람들 전통이라면 무조건 싫어하잖아요. 이렇게 만들어 놔야 찾는 사람도 별로 없고, 만드는 과정은 또 얼마나 힘들어. 그러니 누가 이걸 하려고 하겠어요. 그래도 누군가는 지켜야 하니까 별 수 있어? 평생 이 일하면서 안 해본 거 없이 다 해본 내가 해야지, 허허.”

선생은 이 일을 자신이 부여받은 숙명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일을 배우러 오는 수제자가 있어서 다행히 이 기술은 내 대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질 것 같아요. 나는 이제 죽는 날까지 열심히 연구하다가 죽은 다음에는 여기 있는 내 작품들 다 자료로 기증할 거야. 그러면 전통 기술 복원이라는 내 임무는 어느 정도 완수한 거지, 안 그래요?”

그는 전통 세공의 맥을 잇겠다는 결심 하나로 연구를 시작했고, 흔적만 겨우 남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기술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옛 문헌들을 참고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박물관을 찾았다. 도록에 실린 사진을 통해 디자인과 가공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마침내 조선시대 왕비가 착용했던 용잠(용머리 장식)이 살아났다. 이 비녀 하나를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이 무려 3. ‘한번 보라며 유리 상자 속에서 그가 꺼낸 작품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난다. 비녀 머리 부분에 달린 용과 봉황은 각각 은과 금으로 세밀하게 조각했고 가늘고 날렵한 용의 수염까지도 그대로 표현했다. 그는 이 작품의 완성과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꿈이 해결해 줄 때가 가끔 있어요. 이게 바로 그런 경우인데, 도무지 용과 봉황의 모양이 안 잡히는 거야. 어떻게 조각을 해야 할지 몰라 며칠을 끙끙대고 있었는데, 아 글쎄 이게 어느 날 꿈에 탁 나타나는 거예요. 바로 일어나서 작업을 했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은가락지에도 금으로 만들어 붙인 나비며 꽃들이 그 작은 반지 위에서 선명하게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바로 이 기술이 그의 장기인 누금 기법. 은 위에 금을 얹어 모양을 내는 붙임 기술로 수천 년을 이어온 우리의 전통 기법이다. 매우 정교하고 세밀한 것이 특징으로 이음새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놀라운 기술이다. 속이 빈 은가락지나 비녀의 경우에도 도무지 끝마무리 부분을 찾을 수 없다. 그는 이 모든 기술을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그의 작품은 현재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판매 중이다. 그가 직접 운영하는 것은 아니고 주문에 따라 만들어 주기만 하는 방식. 10돈을 녹여 만든 가락지 한 쌍이 보통 15만 원 선이다. 그는 지난 몇 년간 주문량이 많아 정말 바빴다고 했다. 사극 열풍과 함께 궁중 가락지에 더욱 관심이 쏠렸다.

지난 해에는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을 앞두고는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했어요. 여기서 새벽 네 시까지 일하다 쓰러져 자고, 잠깐 눈 붙이고 또 일어나 일하고 그랬으니까. 하루 종일 만들어야 반지 한두 쌍이니까 주문이 너무 많아도 댈 수가 없어요. 그나마 30년 동안 꾸준히 등산으로 건강 관리를 했으니 이렇게 일을 하지, 안 그랬으면 벌써 쓰러졌을 거예요.”

이렇게 젊은 시절, 우리나라 귀금속업계의 발전을 주도한 그였기에 노후를 전통 기술 복원에 쏟고 있는 그의 소회는 남다르다. ‘현대 작품은 나 말고도 할 사람이 많지만 이건 꼭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강조하는 그는 여생 동안 계속 전통 세공 기술 연구를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한국의 유산 이소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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