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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 정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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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의 역사

우리민족이 즐겨 사용했던 옹기가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이견(異見)이있으나, 농경의 시작과 더불어 씨앗저장의 필요성에 따라 제작된 빗살무늬토기를 그 기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옹기는 저장 및 발효용기로 쓰였는데 이를 문헌자료에서 보면,三國志魏志東夷傳 고구려조의 경우, "집집마다 작은창고를 갖추고 있는데 이를 浮京이라 칭하고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매우 청결하며 잘 저장하고 발효된 식품을 만들어 먹기를 좋아한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신라의 경우는 제31神武王조에 왕이 왕비를 맞이하는데 있어 신부집에 보내는 물품 명세에 쌀, , 기름, , 간장,포와 젓갈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통일 이전부터 저장구와 발효용기인 옹기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비교적 많은 자료에서 옹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경상도 초계군과 진주목 세 군데에 黃甕을 굽는 가마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 초기에 항아리 단지와 같은 규모가 적은 것들이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옹기가 임진왜란 이후 더욱 발전하였다는 사실은 林園經濟志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자료는 옹기가 일상생활에 가장 요긴하게 쓰이는 큰 질그릇이며 그 쓰임새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옹기는 어느 가정에서나 사용하게 되고 마침내는 그림에서까지 옹기를 소재로 삼게 되어 조선시대 말기의 단원과 혜원의 풍습도에서도 옹기가 나타납니다.

1960~1970년대 초까지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던 옹기산업은 아파트문화의 보급으로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옹기를 점차 기피하게 되고, 대체용기와 김치냉장고가 보급되면서 점차 실생활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정윤석장인과 옹기의 만남

그가 처음 옹기에 입문한 것은 열여섯 살,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도중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남보다 2년 늦게 졸업하게 됐습니다. 선생님들도 중학교 진학을 적극 권하셨지만, 형편이 안 되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하였다.

공부를 잘했던 그로서는 공부를 포기하기가 아까웠을 것이다. 그는 젊은 호기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오면 공부할 길이 열리리라는 희망을 안고서. 그러나 서울 영등포역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 부닥친 광경은 어지러운 서울거리였다. 그는 이때 받은 충격이 아직도 생생한 듯하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당시 영등포역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저를 끌고 어디론가 데리고 갔어요.”

그가 아주머니를 따라간 곳은 여관이었다. 그가 맡은 일은 하숙보기, 영등포역에 나가 여관에 묵을 손님을 데리고 오는 호객 일이었다. 그나마 일자리는 잡은 셈인데, 칠량 아름다운 바닷가에 살던 소년은 난장판인 영등포역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다. 곧 고향과 가족, 동무들에 대한 그리움에 빠지고 말았다. 돈만 있으면 시골에서도 학교 다닐 수 있는데 서울에서 공부도 못하고 왜 이러고 있나 싶다는 심정이였으며, 그래서 고향에 내려가 옹기를 배워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정윤석 장인과 옹기의 만남이 시작됬다.


옹기집안의 장인 정윤석

전라남도 강진 칠량 앞바다는 한때 옹기를 실어 나르는 배로 성시였다. 그 바다에 면한 봉황리는 대대로 옹기를 구워 살아온 옹기마을이었다. 마을 가운데 공동으로 쓰는 가마가 네다섯 개나 되고, 아낙네들은 항아리를 씻고, 옹기를 배에 실을 때는 어린애도 나와 작은 단지를 옮기며 거들었다는 마을이다. 그러나 오늘날 옹기를 실어 나르던 그 많던 범선(帆船)은 온데간데없고, 옹기 굽는 집도 단 한 집만 남았다. 그 집이 바로 옹기장 정윤석의 칠량 봉황옹기집이다.

정윤석장인의집안만 해도 옹기 일을 해온 지 6~7대째가 된다고 한다. 전라남도 강진이 옹기마을이 된 지 무려 700년정도가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옹기를 만드는 집도 많았지만 옹기를 직접 만들어 굽지 않는 집이라도 옹기를 팔거나 가마를 관리하거나, 어쨌든 모두 옹기와 관련된 일이 대부분이다.


정윤석장인의 현재

옹기가 되살아나게 된 데는 풍족하고 여유로워진 사람들의 높아진 인식 덕이 제일 컸다. 1970, 80년대 조야한 플라스틱에 열광했던 사람들은 이제 건강과 멋을 동시에 챙길 수 있는 옹기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옹기가 살아 숨 쉬는그릇임이 뒤늦게 밝혀진 것도 일조를 했다.

중요무형문화재가 되면 계승자를 키워내야 하는데 이 점에서 정윤석은 행운아다. 그의 뒤를 잇고 있는 아들 정영균은 아버지가 무형문화재가 되기 훨씬 전부터 스스로 옹기장이가 되기로 결심한 인물 아닌가. 이미 완벽한 옹기장이가 된 아들은 아버지보다 옹기에 대한 애착과 집념이 더 강해 보인다.

아버지의 바람은 이미 이루어진 듯하다. 전통 공예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할 때 자칫하면 전통에 못 미치는 유치한 작품을 만들어내기 쉬운데, 아들 정영균의 작품은 전통을 충실히 지키면서도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 정영균은 멋진 옹기작품으로 이미 전시회까지 한 어엿한 도예가다. 그의 예술성은 처음 배울 때부터 나타났다고 한다.

이들 두 부자지간은 어느새 서로의 든든한 파트너가 되었고 한다.

한국의 유산 김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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