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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초공예 서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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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에서는 1989년부터 매년 완초공예품경진대회가 열린다. 공예품 개발을 육성하고, 군민의 우의를 돈독히 하며, 공예품 생산 농가와 장인의 감소를 억제하고 특산물의 맥을 이어가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경진대회가 열리면 강화의 숨은 공예가들이 작품을 출품하여 솜씨를 자랑한다.

 

공예품경진대회의 단골 입상자 중의 한 사람이 서순임(00) 완초 공예가였다. 서순임 대한민국 전통완초공예 기능전수자는 강화에선 화문석 짜기의 인간문화재로 불린다.

 

양사면 교산리가 고향인 그녀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어머니가 완초 짜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보아 왔다. 자투리 완초로 틈틈이 연습해 오던 중 16살 꽃 같은 나이에 화문석 자리틀 앞에 앉았다. 농한기가 되면 거의 모든 집에서 화문석을 짰다. 대개의 경우 두 사람이 앉아 한조를 이뤄 품앗이를 했는데 한 번은 내 것을 짜고 다음에는 상대방 것을 짜는 방식이어서 호흡이 잘 맞았다고 한다.

 

신라시대 때 직관조(織官條)의 석전(席典)이라는 부서에서 화문석 생산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아 자리의 수요가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벼슬아치들은 가마와 수레 앞뒤에 완석(莞席)을 늘어뜨리고 다녔다. 고려 때 요나라에 보낸 특산물에는 용무늬를 넣은 화문석이 포함됐고 송나라 사람들도 화문석을 탐냈다. 북송의 서경은 고려도경(高麗圖經)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다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깔았는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수요가 늘어나 장흥고(長興庫)라는 기관을 두어 필요한 수량을 조달했다.

 

강화도에서는 고려 중엽부터 왕골 돗자리가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 때 정혜채가 강화직물화연조합을 만들어 강화 지역에서 생산되는 화문석의 품질 개선과 판로에 힘썼다. 그 후 강화산업조합에서 업무를 이어받아 화문석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 전국 규모 공예품경진대회에서 국무총리상, 외무부상, 부통령상 등을 받았다. 196411월에는 경기도청과 군청의 지원을 받아 송해면 양오리와 교동면 읍내리에서 완초공예 기술전시회가 개최되었다. 강화 화문석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염색의 과학화와 현대적 도안 창출을 통해 우리나라의 돗자리를 대표하는 꽃돗자리로 거듭났다.

가난 때문에 시작한 일

 

강화에서 화문석의 주산지는 송해면 양오리와 당산리였다. 1960년대에 이르러 하점면과 양사면 등 강화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즈음 닷새마다 서는 강화장에서는 600여 매의 화문석이 매매되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1991년의 1년 통계에는 화문석 20456, 화방석 20624, 꽃삼합 30371첩이 거래된 것으로 집계됐다.

 

가난 때문에 시작했어요.”

1960년대를 살아온 사람은 알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하여 보릿고개가 무서웠던 시절이다. 강화도에는 농토가 많아서 살림살이가 풍족한 집도 많았지만 소작농을 하는 집도 많았다. 먹고살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남자들은 농한기 때 가마니를 짰고 여자들은 화문석을 짰다. 서순임은 소녀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화문석을 만들어 왔다.

결혼 초기에 돈을 벌기 위해 아이를 시어머니께 맡기고 공장에 다녔는데, 시어머니께서 힘들어서 애 못 봐주겠으니 허든 일이나 하라하셔서 그 후 줄곧 화문석과 완초공예작품 만드는 일만 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는데 남들이 알아주고, ‘아줌마가 아닌 서 여사’ ‘서 선생’ ‘서 작가라고 대우해 줘서 기분이 좋습니다. 이렇게 시방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것도 모두 화문석 덕분 아니겠어요?”

소박한 말씀이다. 그러나 속내는 그렇지 않을 것 같다. 힘들고 힘든, 그야말로 역경이지 않았을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완초를 키웠죠.”

서순임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직접 완초를 키웠다. 모내기철에 심으면 두 달 만에 수확이 가능하다. 완초(왕골, 용수초, 석룡초로도 불림)는 열대지방에서는 여러해살이지만 온대지방에서는 한해살이를 하는 초본(草本)식물이다. 키가 2m까지 자란다. 줄기는 삼각형인데 속이 비어 있고 줄기 전체에 탄력이 있다. 생육기간 중에 온도가 높고 습기가 많아야 좋은 왕골을 얻을 수 있다. 수확한 줄기는 이삭과 잎을 제거하고 쪼갠 다음 이슬을 맞혀 가며 3, 4일 동안 바짝 말린다. 이렇게 말려야만 빛깔이 하얘지고 윤기가 나서 작품을 만들었을 때 품격이 살아난다.

 

완초에 물을 들이려면 중간 부분을 30~50cm씩 잘라서 하루 동안 물에 담갔다가 속을 칼로 훑어 낸다. 겉껍질이라야 염료가 적게 들고 색이 곱게 든다. 왕골 돗자리에 자주 쓰이는 색깔은 회색, 검은색, 붉은색, 황색, 자색, 남색, 녹두색 등이다.

 

서순임은 쪽, 홍화, 치자, 쑥 등으로 자연 염료를 개발하여 물들이는 작업을 시도했다. 자연 염료는 색이 은은해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자연 염료로 물들인 완초를 이용하여 장신구를 만든 결과 인천광역시 관광기념품 공모전에서 창작 아이디어 대상과 금상을 연이어 수상했다.

 

이게 골병틀예요.”

서순임은 화문석을 짜는 자리틀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못이 박였다. 한때 방사쇠증후군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직업병까지 앓았지만 지금은 모두 치료됐다는 서씨는 애들 대학교 등록금 낼 때쯤이면 영락없이 큰 대회에서 상금을 받아 유용성 있게 사용했다면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죽을 때까지 자리틀을 내려놓지 않겠다고 말했다.

 

60만 번의 손길, 화문석

 

6×9자짜리를 혼자 짜려면 20여일이 걸리는데 완성하기까지 대략 60만 번의 손길이 간다고 한다. 참선하는 것보다 어렵다고나 할까. 하루에 8시간 이상 앉아서 고드랫돌을 넘기는 것은 어떠한 일보다 노동의 강도가 센 것이다.

한올 한올 화문석을 짜는 순간만큼은 잡념이 안 들고, 세상사를 모두 잊을 수 있어 좋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집안일을 하면서 쉬엄쉬엄 해도 되니 취미 겸 천직으로 생각해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자칫 한 줄이라도 잘못되면 작품 전체를 망치기 때문이다. 화문석을 집중해서 짤 때는 밤을 새우는 일도 다반사였다는 그는 한번은 집에 도둑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화문석 짜기에 집중했다.”고 밝혔다.

 

화문석을 짤 때는 자리틀, 고드랫돌, 갈구락지, 골망치, 골토막, 꼬챙이, 나일론 실, 도안 등이 필요하다. 화문석은 무늬에 따라 크기가 다양하고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이 있다. 3×5자짜리는 두 사람, 6×7자짜리는 세 사람, 8×9자짜리는 네 사람, 10×12자짜리는 여섯 사람이 한 팀을 이루어 짜는 것이 효과적인데 근래에는 혼자서 작업한다. 화문석을 짜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초보자는 2년간 배우면 웬만큼 작업을 할 수 있다.

 

서순임은 강화군이 인천광역시로 바뀌기 전인 1994년에 경기도청으로부터 작품성을 인정받아 완초 기능인으로 지정됐다. 그녀가 떡살, , 연꽃, 인삼, 학 등의 문양을 넣어 짠 화문석은 매우 곱고 섬세하다. 예전에는 일년에 6×9자짜리 화문석을 15매에서 20매까지 만들었지만 요즘에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체력이 따라 주지 못해서다. 가끔 맞춤자리(신혼용, 선물용)나 작품자리(예술품)를 주문해 오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보람을 느낀다. 가난해서 시작했던 완초 공예가 이제는 예술 작품으로 승화되어 그녀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동안 각종 대회에 출품하여 받은 상은 50번 가까이 된다.

 

플라스틱 제품이 범람하여 수천 년 동안 쓰여 왔던 자연 소재의 생활용품이 설 자리를 잃은 지 오래다. 화학제품은 편리한 반면 결국 공해물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

 

강화 화문석은 겨울철엔 보온성이 좋고, 여름철엔 습기를 잡아주고 냉기를 막아줘 건강에 좋습니다. 사람 수명과 함께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인생의 동반자로 인식돼 왔습니다. 오래 사용하면 색은 변해도 윤기가 나고 번질번질해 감촉은 더욱 좋습니다.”

 

화문석을 비롯한 완초 공예품의 가치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강화화문석은 7, 8년 동안 새것처럼 쓸 수 있고 관리를 잘 하면 20년 넘게 사용할 수 있다. 값싼 수입품은 완초가 부스러기고 곰팡이가 슬어서 오래 쓰지 못한다.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더욱 필요한 때이다.

강화군청에서는 화문석을 보존·개발하기 위한 방안 중의 하나로 200511월 송해면 양오리에다 화문석문화관을 지었다. 서순임을 비롯하여 완초공예조합 회원들이 화문석문화관에서 완초 공예 강의와 실기 지도를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완초 공예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나는 추세다.

 

저는 큰 욕심 없어요.”

서순임은 동갑내기 남편과 두 딸이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서 걱정되는 것이 없다. 다만 완초 공예가로서 좀더 우아하고 아름다운 화문석을 만들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주문한다. 서씨에게는 인천시 주최 관광기념품 공모전에서 은상을 받은 계승자 김미애 씨와 큰딸 전소희 씨가 후계 수업을 받고 있다.

한국의 유산 이소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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