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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벼루> 신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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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 18호 영춘 자석벼루

 

벼루의 역사는 문자문학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그래서 경남 창원 다호리 가야고분에서 붓의 출토는 벼루의 사용을 암시해 준다. 벼루[] 먹을 가는 데 사용하는 문방구로 종이((()과 함께 흔히 문방사우(文房四友) 혹은, 문방사보(文房四寶)라 한다.

충청북도는 단양 영춘 자석벼루의 전통성과 역사성을 인식하고 도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하였고, 영춘 자석벼루의 제작 가업을 이어나가고 있는 신명식(申明植)을 보유자로 인정 고시하였다.

 

벼루는 재질로 볼 때 흙으로 만들되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운 토연(土煙), 흙으로 만들고 유약까지 발라 구워 낸 도연(陶硯), 돌로 만든 석연(石硯), 쇠로 만든 철연(鐵硯), 옥돌로 만든 옥연(玉硯), 나무로 만든 목연(木硯)이 많고 때로는 전연(塼硯), 와연(瓦硯), 니연(泥硯), 상아연(象牙硯), 골연(骨硯), 목심칠연(木心漆硯)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것들도 있다.

국내 석연(石硯)의 경우 함경도 두만강변 종성의 종성석, 평안북도 위원의 위원석, 평안남도 대동강 녹석, 황해도 장연의 장연석과 오창석, 경기도 파주의 파주회초석과 회청석, 강원도 평창의 자석, 정선의 수마노석, 전남 해남의 옥석, 충북 단양의 단양석, 진천의 회청석 등이 그 이름을 떨쳐왔다.

 

충북 단양은 삼국시대에는 적산현(赤山縣), 고려시대에는 단산현(丹山縣)으로 불렸을 정도로 색깔이 붉은 돌[자석, 紫石]이 풍부했던 지역이다.

 

단양의 자석벼루가 언제부터 사용됐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백제시대에 쌓은 경기도 이천의 설봉산성에서 함통 7(867)’이란 문구가 새겨진 자석벼루가 발견된 것으로 봐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자석벼루를 애용했던 것이 틀림없다.

 

특히 고려 말 이숭인은 단양 적성의 자석벼루를 써 본 뒤 도은선생시집에서 벼루의 결은 살과 같이 부드러워 숫돌과 다르고 / 연지 주변 석안점은 꽃이나 별 같구나 / 붓에 먹을 적셔 조충자를 써 보고 / 능엄경을 흉내내니 문득 한 편의 사경이 되었구나라고 칭찬할 정도로 단양 자석벼루에 흠뻑 빠졌었다.

이런 단양 자석벼루를 되살려 내고 4대째 가업으로 이어 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석천(石泉) 신명식 씨다.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인연

 

신명식 선생이 벼루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조부 때부터였다. 신명식 선생은 충남 보령군에서 태어났는데 이 보령군 지역은 질 좋은 오석(烏石, 까만 돌)이 많이 나기 때문에 남포벼루[藍浦硯]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조부(신철휴) 역시 그곳에서 태어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선비였으나 자신이 사용할 벼루를 만들다 벼루 만드는 일을 가업으로 하게 됐다. 대한제국 말기에 이름을 날리던 장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신경득) 역시 부친의 기법과 기술을 전수받아 평생 벼루제작에 열과 성을 다 받쳤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징용되어 단양(지금의 영춘면)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역시 벼루 만드는 사역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부친 역시 장인이었는데, 해방이 되어 풀려나와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역시 생업인 벼루를 만드셨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눈만 뜨면 돌이 있었고, 놀이도 돌을 갖고 했다. 자라면서는 부친의 어깨너머로 서투르게나마 조각을 배웠다. 그리고 18세 때부터 가업을 잇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날 부친이 흘러가는 말로 단양 어딘가에 전국에서 유일하게 자줏빛 돌이 나는데, 벼루 재료로는 세상에 이만한 것이 없다.”라고 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곳이 어딘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옴짝달싹 못하고 작업장에만 갇혀 지냈기 때문에 광산의 위치를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것은 당연했지만, 들을 때마다 속이 상했다. 이때부터 기필코 내 손으로 찾으리란 결심을 하게 된다.

 

최고의 돌이 있다는 말을 듣고 기술자라면 누군들 욕심내지 않겠어요. 도무지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어느 날 무작정 단양 땅을 찾았다. 천하일품 벼루를 만들어보겠다는 일념, 맥이 끊긴 자석벼루를 복원하겠다는 열정이 그를 앞장세웠다. 그리고 단양 일대를 이잡듯이 헤집고 다니길 10여 일. 우연히 만난 한 촌로는 일제시대 일인들이 단양 향산면 가곡리에 있는 산에서 붉은 돌을 캐내 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일제시대 종이와 새끼줄로 포장한 돌덩이를 지게로 운반했다는 가곡면 향산리 노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향산리 일대 산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일제시대 때 원석을 채취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작은 망치와 정을 발견하고, 여기저기 자색빛 돌무더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수풀을 걷어내고 인부들을 동원해 사흘밤낮을 파내려가니 마침내 암맥이 보였다.

 

그때의 기쁨이야 금맥(金脈)을 찾아낸 것보다 더했죠. 그때부터 단양으로 이주하고 본격적으로 자석을 캐내 벼루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자석(紫石) 광맥을 찾아내고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자석 광업권 등록까지 마치고, 1972년에 현재의 작업장과 집과 전수관이 있는 단양군 영춘면 하리로 이사해 정착한 뒤 지금까지 자석벼루 만드는 외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광원권을 취득하고 본격적으로 캐내기 시작했지만, 처음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광산이 길없는 산속에 있다 보니 공장까지 가져오려면 등짐으로 져날라야 했다. 한번 지고 내려오면 한나절이 다갔다. 내려오다 지게를 세워놓고 담배 한 대 물면 자꾸만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는지스스로가 미워 견딜 수 없었다. 지게를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그럴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생계를 떠나 최고를 만들어 내겠다는 일념으로 깎고 또 깎아 나갔다. 조각도를 지탱한 가슴과 손가락 마디마디에 피멍이 들고 굳은살이 해가 갈수록 더 단단하게 박혀 나갔다. 조부와 부친이 만든 벼루를 전통 벼루의 재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단양 자석벼루는 정착 이듬해인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에서 퇴직하는 교육 공무원들에게 대통령 하사품으로 주문하기 시작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서예하는 사람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소장하는 자체를 자랑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 당시 매년 1800개 정도씩 정부에 납품했는데 이런 퇴직 선물용 납품은 1990년대 초부터 끊겼다. 또한 단양 자석벼루는 중국산 값싼 벼루가 나오기 전까지는 일본 등지로 해마다 15~20만 달러나 수출하는 등 인기가 좋았었다. 신명식 선생은 자신의 분신인 단양 자석벼루를 홍보하기 위해 1987년부터 미국 LA, 일본 홋카이도, 대전 엑스포 등 국내외에서 전시회 및 제작 시연을 여러 차례 가지기도 했다.

 

4대째 이어져

 

단양 자석벼루가 1개가 탄생하기까지 보통 7~10일 정도 걸린다. 광산에서 원석이 들어오면 신명식 선생은 다른 색의 입자가 섞이지 않은 선명한 자색(紫色)을 띠고 있고, 망치로 두드려 봐서 둔탁하지 않고 청아한 소리를 내는 돌을 골라낸다.

 

좋은 돌이 골라지면 표면에 자를 만큼 선을 긋고 모탕과 박톱을 이용해 잘라낸 뒤 앞 뒤 면을 다시 잘라 두께를 조절한다. 그리고는 작두칼과 정으로 튀어나온 부분을 제거하는 걷목치기를 하고, 이어 칼날과 정으로 평평하게 다듬는 평미리과정을 거친다. 그런 다음 체질한 고운 강모래를 뿌린 뒤 모탕돌로 면을 갈아내고, 작은 정으로 물집[연지, 硯池]과 연당 등을 파낸다. 이어 조각용 정으로 용, 사군자, 십장생 등을 조각한 뒤 사포로 매끈하게 다듬는다. 이런 과정이 끝나면 먹이 갈리는 부분(연당)에 사포를 이용해 꺼끌꺼끌한 결을 세우는 봉망세우기를 하는데 이것이 벼루 제작에 가장 어렵고 중요한 기술이다. 너무 거칠게 봉망을 세우면 먹이 거칠게 갈려 먹물이 죽처럼 걸쭉하게 되고, 바닥면에 너무 곱게 봉망을 세우면 먹이 갈리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광내기 작업을 하는데, 벼루를 불에 적당히 달군 뒤 자석 원색을 살릴 수 있는 약품을 발라 말린 다음 솔로 표면을 문질러 광택이 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손으로 직접 모든 공정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사군자나 십장생의 경우 작업실에서 10여일 정도 꼬박 작업해야 할 정도로 섬세한 손길을 주어야 한다. 이렇게 신명식 선생이 만드는 단양 영춘 자석벼루는 원석이 부드럽고 단단하여 먹이 곱게 갈리며 찌꺼기가 생기지 않는다. 게다가 먹물에 윤택이 흐르고 강도가 높아 쉽게 닳지 않아 오래도록 보관·사용할 수 있으며 은은한 자주색으로 기품을 보여 최고의 벼루로 평가받는다.

 

신명식 선생의 노력과 기술이 인정을 받아 1992년에 전국 제2녹색지대 민속공예품 품평회에서 국무총리상을, 1999년에는 관광공예품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2000년에 충청북도 공예품 대전에서 특선을 받은 데 이어 2006년 노동부로부터 전통 벼루 부문 기능 전승자로, 2008년에는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8호 벼루장으로 지정됐다. 이처럼 훌륭한 단양 자석벼루도 지금은 중국산 유사제품에 밀리고 수출이 막히고, 내수도 부진해 겨우 식구들이 먹고 사는 정도로 판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값싼 중국산 벼루의 수입과 포장 먹물이 생산되면서 벼루를 찾는 이들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탓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서예 문화가 예전만큼 관심 받지 못하는 탓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러다 자석벼루의 맥이 끊어지는 것은 아닌지은근 걱정이 되기 시작할 무렵,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는지 아들 민호 씨가 선뜻 맡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군을 제대한 민호 씨가 아버지를 따라 벼루를 만들고 싶다며 칼을 잡는 것이었다. 컴퓨터 공학도를 꿈꾸던 아들이 모두가 손사래치며 떠난 벼루를 만들겠다니. 자식이지만 대견하기도 하고, 너무나 고마웠다.그 로부터 4. 아들 민호 씨는 벼루 만들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조각을 배우고 있다. 모두가 떠난 허름한 공장 한켠 작업장에서 밤낮으로 벼루를 쓰다듬고 있다. 조각도를 움켜쥐고 철처럼 강한 돌을 나무 깎듯 조각해 내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선생의 눈에 애정이 가득하다.

 

아직 멀었지요. 아버지께서 웃으시려면 조각만 해도 몇 년을 더 익혀야 할 것 같아요. 제 조금이나마 돌의 성질을 알 것 같아요. 차근차근 가르쳐 주시는 대로 배워 나가야죠.

 

돌가루 먼지가 풀풀 날리는 작업실에서 오직 친구라고는 수많은 돌들과 음악을 들려주는 라디오 한 대. 하루 10시간씩 돌덩어리와 씨름하지만, 이 일이 너무나 재밌고, 한번도 택한 길을 후회한적 없다며 얼굴 가득 웃음을 터트렸다. 오로지 최고의 벼루를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암맥을 찾아 들어온 단양. 그리고 지독한 역경 속에 아름답게 꽃피운 자석벼루. 주문이 예전만 못하고 모두가 떠났지만, 선생은 지금 외롭지 않다. 그의 곁에 언제보아도 듬직한 아들 민호 씨가 있기 때문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부자는 아무도 찾는 이 없는 단양의 허름한 공방에서 남한강이 들려주는 맑은 물소리와, 철따라 보여주는 소백산의 아름다운 자취를 벗삼아 오늘도 구도(求道)의 길을 걷고 있다.

한국의 유산 이소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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