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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 심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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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의 동림 매듭 박물관에 가면

 

서울 가회동은 북촌한옥마을의 한 귀퉁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한다는 긍지를 지닌 서울의 명당동네이며 소중한 유산인 1000여 동의 한옥이 있는 곳이다. 그곳 골목길에 동림 매듭 박물관’(www.shimyoungmi.com)이 있다. 2000년 서울시의 후원을 바탕으로 한국 공예 예술가협회가 주관해 설립되고, 20044월 문을 열었다. 박물관 설립을 주도한 심영미 관장(한국 공예 예술가협회 부회장)은 가문 대대로 매듭과 관련한 일을 한 집안 출신이다. 심 관장의 시왕고모는 조선 궁중에서 매듭 맺는 일을 했으며 심 관장의 시아버지는 그 기술을 전수 받아 40년 동안 관련 일을 지속했다. 또 심 관장도 프랑스와 네덜란드, 벨기에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 초대 작품전을 연 경력을 갖고 있다.

 

박물관의 전시공간은 크게 세 곳으로 나뉘어 있다. 전통관에는 <낙지발 대삼작 노리개> 등 매듭을 이용해 제작된 조선시대의 작품을 주로 전시한다. 현대관에는 <투호 삼작 딸기술 노리개> 20세기 이후 제작된 매듭 예술품을, 문화 상품관에는 <나비 끈목술 브로치>와 목걸이 등을 전시하고 있다.

 

공방이자 박물관인 이곳에서는 옛 조선조 양반가의 여인네처럼 다소곳이 앉아 매듭을 만들 수 있는데 그 공간의 협소함이 마음에 든다. 5~6명이 들어가도 비좁을 정도이기에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단체 수업이 아니라 조선시대 규방공예의 전수방법 그대로 서너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고 배울 수밖에 없다. 툇마루에 나와 앉아 매듭을 배우기도 한다. 올망졸망 아이들이 오면 어린 손녀를 무릎에 앉혀놓고 귀여워하는 할머니와 아이의 분위기라 더욱 좋다.

 

가회동에 있는 대부분의 박물관은 이사를 가거나 버려진 북촌 한옥을 리모델링해 매듭, 민화, 자수 등 전통문화 보존장소로 만들려는 서울시의 지원을 받는다. 따라서 적은 비용으로 전통문화를 배우고 익힐 수 있다. 하지만 찾는 사람이 적으면 매듭공방도 사라질 터, 문턱이 닳도록 부지런히 다녀 우리의 한옥이, 전통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미래를 짊어질 고사리 손들이 우리 전통의 매듭을 지어보며 자란다면 우리의 것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매듭이 이쁘니까 하는 것

 

매듭을 시작한지 반 백 년이 흘렀어요. 사람이 좀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하나 하면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이에요. 매듭이 싫었으면 못했을 거예요. 하면 재미있고, 만들어 놓으면 이쁘니까 하는 거죠.”

갖가지 빛깔로 염색된 명주실을 손바닥으로 비벼가며 실을 꼽니다. 꼬인 실이 다시 고운 문양의 매듭으로 변해간다.

매듭은 명주실을 염색하고 합사(合絲)해 끈을 짠 뒤 여러 형태로 맺은 공예 장식품이에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각기 다른 형태의 매듭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매듭이 문화와 전통을 반영하기 때문일 거예요.”

특히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발달했지만, 유독 우리나라만 고운 빛깔의 풍성한 술을 늘어뜨린다. 우리나라 매듭의 가장 큰 특징이 생활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재료()의 특성상 오래된 보존이 힘들어 삼국시대부터 그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유물이 남아있는 정도라고 한다. 백제금동대향로 뚜껑 정상부에 5명의 악사가 든 악기의 끝에 장식이 늘어진 것, 금동반가사유상 허리띠부근에 술을 단 것으로 보이는 정도.

 

전통 장신구나 소품 등에서 매듭은 감초같은 역할을 했다. 악기나 옷을 포함해 과거에는 왕실의 장물(국새, 칼 등), 불교장엄장식, 노리개, 주머니, 쓰개, 갓 등에 붙이는 장식으로, 최근에는 발걸이, 좌등 등 실내장식 용도로까지 쓰이고 있다.

 

열아홉에 시작한 일

 

“19살 때부터 매듭을 맺었어요. 궁중에서 매듭 일을 하셨던 시왕고모님 그리고 시아버님께 우리나라 전통매듭을 사사받았죠. 시아버님은 원래 이웃에 사는 어르신이었어요. 매듭을 하나 배우면 집에서 만들어서 가져다 드리곤 했어요. 시키는 것을 잘하니 나중에는 들어와서 해보라고 권유하셨죠. 40명 가까운 아가씨들이 한 방 가득히 앉아서 일을 했어요. 그리고 셋째 아드님과 결혼을 했죠. 저는 많이 만들지는 못하지만 제대로 하는 성격이어서 귀한 일을 맡았어요.”

 

당시 조카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라 다른 직장을 못 다니고 있었는데, 집에서 할 수 있는 일거리로 매듭이 괜찮겠다 싶어서 이웃 어르신에게 배우게 된 것이라고. 그런데 심영미 선생이 만들어 간 매듭을 할아버지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고 한다.

 

그 뒤 매듭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한 번도 매듭을 하게 된 것에 대해 의심해 본 적이 없단다. 남들이 조각보, 자수 등과 병행할 때도 오직 매듭 하나에만 매달렸다고 한다. 남들보다 뛰어나게 예쁜 매듭을 만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밤을 새워서라도 마음에 들 때까지 정확히 만들곤 했다고. 러한 원칙에 대한 고집이 장인정신이 아닐까.

 

“80년대 중반쯤에는 고등학교, 대학교 가사시간에 강의를 나가기도 했어요. 집에 이화여대 학생들이 와서 배우기도 했구요. 처음에는 그저 있는 대로 판매했지만 나중에는 직접 고객을 상대하게 되었어요. 개개인의 기호가 다르니까 다양한 매듭, 술을 만들게 되었고, 필요에 의해서 가지고 온 물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매듭을 만들어 주게 되었죠. 일종의 예술 작품 마무리 컨설팅을 하게 된 셈이예요. 덕분에 매듭이 정말 마무리를 짓는 작업이구나새삼 깨닫게 되었죠.”

그리고 심영미 선생이 꼽는 일, “2007년에 제작된 국새의장품은 참 보람 있었던 일이었죠. 다양한 분야의 장인들이 모여 합작했었는데요. 저는 국새 저고리보와 내함 겹보자기를 묶는 다회끈, 자물쇠를 보관하는 가죽주머니의 다회끈, 상 위를 덮는 천의 술을 만들었어요.

4m의 술 하나를 만드는 데도 6개월이 걸리기도 하는데 국새의장품을 만들 때는 어땠겠어요. 고된 시간이기도 했지만 제 인생을 다시 돌이켜봐도 최고의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이후 우리나라 고유 기능 보유자로 20년 이상 해당 분야에 종사한 장인에게만 주어지는 기능전승자라는 선물도 받게 되었죠.”

 

조선 말기 이후 일제 강점기에 전통문화말살정책으로 많은 문화가 훼손되었고 근대화 물결과 함께 서구 문물이 급격히 밀려오면서 매듭 또한 용도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 동안 거의 끊기다시피 한 한국매듭의 전통을 몇몇 장인이 간신히 이어온 덕분에 아름다운 매듭을 지금까지 볼 수 있는 것이라고.

 

균형과 질서의 미학, 매듭

 

전통 매듭을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매듭을 대중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지금은 한복을 입는 사람도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노리개 위주가 아니라 목걸이, 브로치, 팔찌 그리고 장식품 등으로 영역을 확대하려고 힘쓰고 있죠.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왔을 때 하나 정도는 가지고 가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도록 매듭을 개발하려고 노력해요.”

그렇다. 그녀는 옛 것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운, 새로운 전통을 엮어 가고 있었다.

 

매듭 한다고 하면 늘 집 안에만 있을 것 같다고들 하시는데 저는 정말 여행을 좋아해요. 여행을 하면서 새 매듭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 편이에요. 매듭은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색상의 조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여행할 때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색깔들을 기억해 놨다가 집에 돌아와서 응용해 봐요. 어떤 색깔들이 배합돼서 내 눈에 이렇게 예쁘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인지 연구하는 거죠. 자연에서 여행하다 보면 매듭도 곧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게 되는 거죠. 자연에서 따온 매듭은 디자인이나 색감이나 항상 편안한 느낌이 들어요.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 아닐까요?”

여유로워 보인다. 그리고 심영미 선생은 매듭을 널리널리 퍼뜨리는 게 꿈이란다.

 

그녀가 작업한 매듭의 색깔은 실로 다양하다. 이 계통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먼 곳에서 노리개의 색깔만 보고서도 그녀의 작품임을 알아챈다. 그녀는 매듭을 반복적으로 만들어 수익을 내는 일엔 관심이 없다.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그녀에게 돈 역시 억지로 번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 의상에 더 잘 어울리는 매듭을 만들고 보급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여행이라는 일상의 쉼표를 잊지 않고 실천한다.

 

일주일 중에 닷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 이틀 정도는 자연에서 사는 편이에요. 양평에 작은 텃밭을 가꾸고 있거든요. 실 염색 재료나 홍화뿐만 아니라 감자나 배추 등도 심어놨어요. 제자들이 놀러 와서 자연염색을 하기도 하고 재배한 농산물을 함께 나누어 먹기도 해요.”

제자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그 마음 속에는, 단단한 다짐이 자리 잡고 있다.

 

기능전승자가 중점을 둬야 할 부분은 전통기능이 현대산업과 연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에요. 활발한 작품 활동과 함께 후배들에게 전통매듭을 잘 전수해주는 중간 역할을 착실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요.”

매듭이라는 분야라서 그럴까. 평생을 매듭을 지어온 사람답게 어떤 마무리, 제 역할 등에 매서울 만큼 정확한 듯하다.

 

매듭을 맺는 일은 마음을 가다듬게 하고 삶을 허투루 살지 않게 하지요.”

마음에 남는 말이다. 반드시 순서를 지켜 매듭을 맺어야 한다는 점, 한 올이라도 비뚤어지면 제대로 된 모양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 매듭에서 배워야 할 균형과 질서가 아닌가 싶다. 심영미 선생이 말하듯, 매듭의 미학은 균형과 질서가 분명하다.

한국의 유산 이소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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