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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빗 제작> 김기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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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죽과 얼레빗

 

낙죽(烙竹)이란 인두로 대나무 겉면을 지져서 글씨를 쓰거나 그림과 무늬를 표현하는 기법이나 이와 같은 기법으로 만든 대나무 공예품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대나무에 인두로 화문(畵紋)을 그리는 것을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할 때에는 종이나 대나무, 가죽, 비단 등에 인두로 그리는 모든 글[] 혹은 그림[]을 검누르게 지져내는 것을 낙죽(烙竹), 또는 낙필(落筆), 낙화(烙畵)라고 부른다.

 

낙화의 시초는 소인(燒印)으로부터 시작된다. 옛날에는 우마(牛馬)와 죄인에게 낙인을 찍어 죄인이라는 표시를 한 일이 있었는데 우마에게 표시하는 것을 소인이라 하고 죄인에게 표시하는 것을 낙인(烙印)이라 하였다. 우리나라 낙화의 시초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명확히 구명할 만한 문헌은 없다. 조선시대에 일반 생활필수품의 수요에 따라 낙인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대전회통(大典會通)등 기타 조선시대의 직제 중에서 낙죽장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언제 어떻게 전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상고(五洲衍文長箋散稿)순조 말에 박창규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낙화를 잘 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박창규가 조각과 낙죽에 능한 인물임을 알 수 있으나, 낙화와 낙죽을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사람인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낙죽하는 작업을 () 놓는다고 하거나 낙질한다또는 낙지진다라고 하는데 이때 쓰이는 도구는 인두와 화로뿐이며 인두는 바느질 인두와는 형태가 다른 자 모양이고 안으로 굽어서 인두의 몸체는 앵무새 부리처럼 두툼하게 생겼으나 끝이 뾰족하다. 인두는 두 개를 준비하여 화로에 꽂아 두고 번갈아 사용하는데, 이는 알맞은 열기(熱氣)를 계속 유지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인두가 알맞게 뜨겁도록 하는 일과 알맞게 뜨거워진 인두를 사용하는 일은 기능공의 숙련과 경험에 의하여 기술을 발휘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두가 너무 뜨거우면 무늬의 강도, 즉 색채의 표현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 열이 약하면 무늬의 색채가 얕아져 색조변화가 생기고 작업에 진전이 없다. 인두의 적합성 여부를 시험할 때에는 인두를 볼 근처에 가까이 대고 열기를 가늠하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 경험에 의하여야 이루어진다. 낙죽에서 인두를 쓰면서 농담(濃淡)을 섞어 문양, 즉 무늬나 그림의 내용을 효율성 있게 나타내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낙죽장은 날렵한 재질과 속력이 있어야 하고 경험과 훈련 또한 많아야 한다.

 

인두가 얼마나 달구어졌는가에 따라 선의 강약이 다르기 때문에, 열이 높으면 빠른 손놀림이 요구되고, 열이 낮아지면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높은 열에서는 선을 그리고, 낮은 열에서는 질감을 넣어야 한다. 이런 작업은 오랜 숙련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낙을 놓은 후 마무리 작업을 하게 된다. 낙죽은 대나무의 표면을 장식하는 기법이지만, 마무리는 목공예 기법에 사용하는 여러 칼(편도, 환도)과 톱, 끌 등을 활용하여 마무리 작업을 한다. 아무리 낙죽이 잘 되었어도 마무리를 잘 하지 않으면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지므로, 낙죽을 작품화하려면 목공예 솜씨도 있어야 한다.

 

낙죽은 이제까지 크게 각광을 받거나 주목받는 일이 많지 않았던 죽공예의 하나였다. 그러나 우리만의 독특한 전통공예의 하나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아 전승되고 있다. 을산(乙山) 김기찬(57) 선생이 중요무형문화재 제31호 낙죽장 기능 보유자가 된 것은 2000년이다. 99년에는 얼레빗 기능전승자로 지정됐다. 얼레빗은 빗살이 촘촘한 참빗과 달리 빗살이 굵고 성긴 반달 모양의 빗이다. 생김새가 반달 모양이라 월소(月梳)라고도 불렀다.

 

누가 곤륜산 옥을 베어내어

직녀의 머리 빗 만들었나.

견우 한 번 떠나간 뒤

수심에 젖어 푸른 허공에 던져버렸소

 

황진이가 반달을 하늘에 던져버린 직녀의 머리빗이라 한 것도 그 생김새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김기찬 선생 얼레빗을 만들게 된 것은 이렇다.

 

“1980년 초부터 민예품을 제작해서 출품을 하게 되었죠, 85년에 도자분야의 조기정 선생님이 자료를 주시면서 얼레빗을 만들어 보라는 권유에 의해서 3개월여 제작하여 출품을 했는데, 전라남도 공예전에서 3위로 입상하는 성과가 나왔습니다. 86년에는 장려상, 87년에는 대상 등 좋은 성과에 힘입어 현재까지 작업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낙죽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자네는 그림과 글씨를 공부했으니까 그 바탕 위에 낙죽을 하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자네가 열심히 해가지고 내 칼자루에 낙() 좀 넣어주소.”

사군자와 산수화를 배우러 이종득 선생의 광주 화실에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그 곳에 자주 들르던 광양의 장도장(粧刀匠·중요무형문화재 제60) 박용기 선생이 어느 날 김기찬 선생에게 한 청이었다. 이 부탁이 시작이었다. 먼저 담양의 이동연(19111984) 선생을 찾아갔는데, 그 때가 83, 그러니까 돌아가시기 얼마 전으로, 선생은 병환중이었고 배우는 제자도 없이 그저 쓸쓸했다.

 

김기찬 선생은 1955년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복정리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중농 수준 정도여서 어렸을 때 그다지 배를 곯지는 않았다고 한다. 당시 대부분의 농촌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그도 농사부터 집안의 잔일까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하였다. 아버지는 짚으로 만드는 물건인 멍석, 둥구미, 걸망태 등과 싸리나무로 엮어 만드는 채반, 소쿠리, 삼태기 등 무엇이든지 모양이 좋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한학을 하였으며 의술에도 조예가 있었다. 할아버지에게는 마음과 외모, 체질을 닮고 아버지에게는 손재주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선생은 젊었을 때부터 자수성가를 하겠다는 바람이 있었다고 한다. 20대이던 1970년대 중반에 우연한 기회에 만난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그의 사랑방을 내주고 관광기념품 용도의 그림 그리는 것을 뒷바라지해 주었다. 이때 선생도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78년 한려수도 단체 여행단에 끼어 남도 여행을 하였는데 그때 송광사에서 받았던 인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결국 그 해 가을에 다시 송광사에 왔다. 송광사 청량각 아래에 있는 여관 겸 식당을 하는 집에 하숙을 정하고 한 달이 넘게 머물렀다. 지금의 장인인 여관 주인이 큰 딸과의 혼사를 제의하여 1980년 초 결혼을 하고 송광사에 정착하게 된다.

 

결혼 후 공부에만 전념하여 송담 이백순 선생에게 매일 1시간씩 한문을 배우고 순천의 상운 김영도 선생에게 붓글씨를 배웠다. 이어 광주 무등산 관음암 스님의 권유로 광주에 있는 장진회라는 화실에서 국제 이종득 선생에게 사군자와 산수그림을 배웠다. 그때 화실에 자주 놀러 오던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 박용기 선생을 만났다. 당시 박용기 선생은 광양에서 자신이 만든 죽패도를 담양에 가서 낙을 놓으려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김기찬 선생에게 권유하였다고 한다. 이런 권유로 1983년 초에 담양에 가서 이동연 선생에게 낙죽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당시 낙죽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6개월 후에 국비 전수장학생이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드나들었는데 1985년에 이동연 선생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막막하였다. 그럼에도 낙죽을 계속하였고 그 결과물인 작품을 전승공예대전에 한 해도 빠짐없이 출품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활동을 인정받아 이동연 선생이 작고한 지 3년 후에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으로부터 이수증을 받을 수 있었다.

 

1987년 국양문 선생이 낙죽장 보유자로 인정받은 이후 김기찬 선생은 국양문 선생의 전수교육 조교가 되어 낙죽의 대를 잇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1988년부터 전라남도에서 추진하였던 공예인 지원 프로그램 덕분으로 광주대학교의 김종식 교수에게 3년 정도 디자인을 지도받았다. 또한, 1986년부터 3년간 전 동신대학교의 김병록 교수에게도 목공예를 지도받게 된다. 중요무형문화재 낙죽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은 2000년에 송광사 내에 공방을 짓고 이름을 금죽헌 공예미술관이라 하였다. 그런데 2008년 이 공예미술관에 불이 났다고. 그 뒤 송광사 금죽헌에서의 29년 활동을 뒤로하고 계심헌에 자리 잡은 뒤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다.

 

금죽헌에서 가졌던 전시회뿐 아니라 여러 번의 전시회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2000·2002년 금죽헌 전시회

2001년 뉴욕 롱아일랜드 대학 힐우드 미술관 특별전 <동방의 빛> 참가

2001~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작품전 출품 및 전수교육 활동

2008년 계심헌 공예미술관 개관

2009년 프랑스 보르도시 전시 및 시연

2009년 신작발표전 텅빈 충만에서 빛의 세계로

2010 한국미용박물관 개관 2주년 기념전 빗에서 빛으로

2011년에는 새옷 입고 부르는 노래세 번째 전시회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단행본을 내기도 했는데, 공저로 낙죽장(국립문화재연구소)을 펴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을산(乙山)이란 호에 담긴 뜻처럼 늘 정진하는 삶

머리털 없는 산사에 와서 빗 만드는 빗장이가 되었으니 참으로 각별한 인연이지요.”

송광사를 떠나와서도 여전히 그 인연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다고. 그리고 아들 승혁이도 전수장학생이 되어 낙죽과 서예를 배우고 있으니 대를 잇고 있는 셈이다. 아들을 보면서 혈기왕성한 나이에 처음 낙죽을 배운다고 앉았던 시절이 떠오른다고 한다.

 

낙죽을 하는 데는 자세가 중요해요.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반가부좌 자세로 앉아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아요. 진득하게 참들 못하고 10분도 못돼서 벌떡 벌떡 일어나곤 했지요. 그 때마다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잘 쓸라고 하기보다 고소한 맛이 나는 글씨를 쓰고 싶었어요. 새로운 시도를 해야만 고이지 않고 썩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지요.”

그의 호는 을산(乙山)이다. 갑산(甲山)은 정상이어서 더 올라갈 곳이 없으니, 자신을 그보다 낮은 곳에 두고 늘 정진하며 살겠다는 뜻이다. ‘늘 지금이 가장 좋아라라는 글귀처럼 지금에 빠져서 온 정성으로 낙을 치고 얼레빗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유산 이소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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