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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보유약제조> 원화 김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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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 빛깔 고운 한복이 빛을 발하는 명절이나 결혼식이면 한복에 어울리는 장신구가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복은 무엇보다 정갈하고 기품 있게 연출하는 것이 관건이다. 함께 연출하는 액세서리를 잘만 골라도 한복 고유의 멋을 한층 살릴 수 있다.

금속에 유약을 발라 녹여 부착시킨 칠보반지는 발색과 광택이 우수해 원색을 주로 사용하는 한복과 잘 어울린다. 쌍 가락지로 겹쳐 착용하거나 두툼한 굵기의 반지를 선택하면 한복의 풍성한 볼륨과 우아함을 살리기에 좋다.

 

한때 칠보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칠보 쌍가락지를 친구와 나눠끼기도 했던 80년대.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가업을 이어받아 40년 넘게 칠보공예를 하고 있는 원화 김선봉(1949년생) 씨가 같은 분이 계신다. 10년 넘게 제주에 정착해 공예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200556·서귀포시 신효동)

 

 

칠보공예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어요?

 

칠보공예는 금속이나 기타 바탕이 되는 물질 위에 유리질의 유악을 올리고 그 위에 문양이나 형상을 그려 구워낸 후 수 차례 작업에 걸쳐 작품을 완성하는 공예를 말합니다. 칠보는 불교에서 말하는 7가지 보배를 일컫는 말로서 경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흔히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금, , 청옥, 수정, 진주, 마노, 호박의 7가지 보석을 가리키며 이집트를 기원으로 불교문화권 뿐만 아니라 유럽으로 확산돼, 많은 세계인들의 손에서 자국 문화를 담은 작품들로 탄생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파란이라고도 불렸던 칠보는, 삼국시대 유물에서 처음 발견됐으며 조선시대 귀족들이 애용했던 장신구로 그 진가를 발휘했다. 우리나라의 칠보는 파란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엿가락처럼 생긴 덩어리를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여 가루를 빻아 올려 구운 것이다. 삼국시대의 금제 장신구에서 처음 나타난 것인데, 저화도(500이하)에서 녹는 것으로 청색 한가지뿐이었다. 그 뒤 조선조에 이르러 파란의 색상이 네 가지 색으로 황색(짙은 노랑), 검정과 남색의 중간색인 감색(紺色), 파란색과 초록색의 중간색인 벽색(碧色), 보라색 계열의 가지색[紫色]이 사용되었다.

 

이 색들은 온도의 차이와 유약의 두께에 따라 다소 변화가 있어서 고온(600℃∼700)일 경우 황색은 금향색(錦香色, 누런색), 감색은 회보라색으로 발색되어 색상은 진하게 되고 어두워진다. 저온일 경우는 전체적으로 엷은 색으로 나타나고 유약이 잘 녹지 않으면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투명한 맛이 적어진다.

 

, , 구리, 유리, 점토 등의 바탕 위에 칠보 유약을 얹어 불에 굽는 작업을 통해 완성되는 불의 예술 칠보는 노리개, 비녀, 가락지와 같은 전통 장신구 외에도 생활소품, 인테리어 장식 등의 현대 장신구에서도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칠보 유약은 불 속에서 만들어진 색이어서 반영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색깔을 내는 유약을 바른 뒤 고온의 가마에서 굽는 전통방식의 칠보공예입니다.”

칠보공예의 빛깔을 좌우하는 것은 유리로 만든 유약. 금속에 입혀 가마에서 구워지면서 아름다운 보석 빛깔을 띠게 된다.

 

칠보 유약은 불 속에서 만들어진 색이어서 반영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칠보의 특색은 같은 색상이라 하더라도 소성과정 및 바탕재료에 따라 발색이 달라지기도 하므로 그 재료의 열팽창률·수축률·융점 등의 특성을 잘 활용하면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다. 칠보예술의 평가기준이 되는 것은 유약을 전면적으로 다채롭게 입혀 조화시키는 것이고, 색채의 오묘함과 찬란함을 연출하는 색채구사의 창작성에 있다.

 

언제부터 칠보공예를 시작하셨나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칠보공예를 시작했으니 벌써 35년이 넘어가고 있네요. 아버님의 기술을 물려받아 저도 2대째 칠보공예가의 길을 걷고 있고, 그런 영향 때문인지 제 안사람을 비롯해 형제, 친척 등 주위 가족들 또한 저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답니다. 칠보공예를 연구하고 보급하는데 너무 몰입한 나머지 몇 해 전 건강이 무척 나빠지기도 했었는데, 곁에서 가족이자 동료인 그들이 항상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었지요

 

금하칠보는 김선봉 씨의 아버지 김이두 씨가 1965년 액세서리 제조업체를 설립하면서 출발, 현재는 액세서리 제조에서부터 원재료 생산 · 판매, 공예 교육 등 칠보와 관련된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젊은 시절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가족부) 소속의 공예 기술자였던 창업주는 소록도 나환자촌에서 근무하다 1962년 경기도 부천의 청소년 직업훈련소 교사로 발령받는다. 하지만 평소 공예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공직을 그만두고 창업을 결심, (서울 은평구 응암동) 옆에 작은 액세서리 공장을 차렸다. 이와 동시에 남대문 삼호마켓에 액세서리 전문 매장을 내고 금하상회라고 이름 붙였다.

 

창업 초기에 진주 장식품을 만들어 팔던 그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장남 김선봉 씨에게 당시 국내 유일의 칠보 공예가였던 고병호 씨로부터 유약 제조 기술에 관한 가르침을 받을 것을 권유한다. 전통 기술인 칠보를 액세서리 사업에 접목시키면 대박이 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김선봉 씨는 1년 동안 기술을 전수받은 후 칠보유약 제조와 제품 디자인을 담당하고, 매장 경영과 판매 부문은 장녀인 김선경 회장이 맡았다. 두 사람은 아버지와 함께 회사를 꾸려갔는데 창업주가 고혈압과 당뇨 합병증으로 갑작스럽게 쓰러지면서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이끌게 된다.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금하상회는 초고속 성장을 구가한다. 액세서리 제조업체가 몇 곳 없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하지만 값은 저렴한 칠보가 소비자 취향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어버이날 같은 기념일에는 선물용 브로치 등을 사려고 손님들이 가게 앞에 100m를 줄 지어 기다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룻동안 들어온 돈을 자루에 쓸어 담아온 뒤 가족들이 다 같이 방에 모여 그날의 수입을 계산하곤 했다.

그렇지만 경제가 발전하고 국민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칠보에 대한 관심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눈높이가 높아진 국민들이 칠보보다는 순금이나 은을 먼저 찾기 시작한 것. 100% 수작업으로 제작되는 칠보의 특성상 인건비가 급격히 올라가면서 채산성 유지도 어려워졌다.

 

결국 남대문 매장을 포함한 4개 매장과 공장을 폐쇄했다. 공장이 없어지면서 김선봉 씨는 유약 제조와 작품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갔다.

 

단국대 대학원 금속공예학을 졸업한 후, 지금까지 활동경력이 화려하시다고 들었어요...

 

“(웃음) 1983년 한국칠보작가회 창립전을 출품한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해 1982년에는 프랑스 리모쥬 국제 칠보전 4위에 입상했고, 1985년 미국 애나멜 길드전 출품, 1988년 일본 긴자 아오키메탈 초청전을 갖었습니다. 1986년 제16회 서울시 공예품 경진대회 입상했으며 1995년에는 김포공항 국내선 연결통로벽화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금하칠보개발연구소 소장을 맡아, 일반인들에게 칠보공예를 보급하고 새로운 칠보 기술연구에도 주력하고 있습니다. 2005년 칠보유약제조 분야에서 기능 전승자로 선정되었습니다.”

 

김선봉 씨는 세계적 대회인 프랑스 리모쥬 칠보비엔날레에서 입상할 만큼 세계에서 가장 영롱한 빛깔을 만드는 칠보유약제조 분야 최고의 장인이다. 2011 한일 칠보공예국제교류전을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처음 개최되는 한일 칠보국제교류전은 화합이라는 주제로 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본 국민들의 아픔을 공유하고 한일 우호관계를 증진시키는 조화와 화합의 장을 만들고자 하였단다.

 

김선봉 씨의 조카이기도 한 한국칠보공예협회 박수경 이사장은 협회의 칠보공예 해외전시 및 해외매장 오픈 경험을 토대로 추후 지속적인 칠보공예의 세계화를 위한 사업의 일환이라며 한국 칠보에 대한 전통적 의미와 현대적 기법 등 한국의 이미지를 통해 나타나는 칠보공예의 우수성을 알리고 일본 작가의 참여를 통해 공예의 다양성과 문화적 차이를 공감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국내 칠보공예작가 31명과 일본 칠보공예작가 27명으로 구성된 58인의 한일 칠보공예작가는 김선봉 작가(칠보유약제조 기능전승자, ()한국칠보공예협회 고문)와 하세가와 요시코 작가(하세 淑子 칠보공방 주재, 칠보조형그룹 花白 조장)를 필두로 양국의 전통칠보작품과 현대칠보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칠보공예품 제작뿐만 아니라 칠보공예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인 칠보유약을 직접 제조해 공급하는 기능전수자이기도 하신데...

 

칠보의 빛깔과 문양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 하나가 유약입니다. 유약을 바르고 수차례 가마에서 굽고 난 뒤 수 차례 모양을 두드려내고 또 구워내고, 이러한 반복적인 작업을 끝내고 나서야 칠보공예작품이 탄생되는 것이죠. 굽는 온도에 따라 유약의 색깔이 달라지기 때문에 온도를 맞추는 일이 가장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유약에 대해 연구하면서 유약을 바르고 가마에서 굽고 나면 조각조각 갈라지는 등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작품활동 뿐만 아니라 지금도 더 많은 종류의, 더 다양한 빛깔을 담아낼 수 있는 유약을 개발하는 데도 많은 시간 몰두하고 있습니다.”

 

칠보 작품을 만들면서 궁극적으로 표현하시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민족의 옛 문화를 살펴보면 원시적 생활을 할 때부터 무엇인가 특이하거나 아름다운 것을 몸에나 옷에 붙여 장식하길 좋아했습니다. 이런 장식품들을 미에 대한 표현 혹은 권위의 상징, 몸을 지키는 부적으로 사용해왔지요. 모두 자연 속의 재료를 인간의 손으로 하나하나 깎고 다듬어 만든, 정성스러운 것들입니다. 현대에 오면서 인간이 상상해낸 것들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제작 기술과 금속 재료의 발달로 많은 작품들이 편리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저는 제 작품을 통해서나마 옛 선인들의 그 손길을 떠올려 보고 싶습니다. 제가 작품 활동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과 자연이 얼마만큼의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까 하는 것입니다.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손끝의 정성과 흔적을 담아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 이런 것들이 한순간 화려하고 인위적으로 빛나는 보석이 아닌 은은한 멋스러움으로 아주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는 수려함을 간직할 수 있는 작품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예술활동은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하는 사람이든, 작품을 보는 사람이든 그것을 통해 기쁨을 주고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저도 오랫동안 즐거움으로 기억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제주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제주 안에 모든 것들이 다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앞으로도 계속 제주에서 지내면서 더 많은 이웃들에게 칠보공예를 알리고 보급하고 싶습니다. 훗날 마을 주민들이 모두 함께 칠보공예 문화를 전수할 수 있는 칠보공예 전통 전승마을을 가꿔나가, 계속에 더욱 유명한 제주로 기억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꿈을 꾸면서 말이죠

 

명인으로 추대되어서도 자기 직업에 대해 긍지를 갖고 어려움 속에서도 외길을 걸을 수 있는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지 명인으로 불러져야 마땅하다. 나는 그 수많은 명인 분들 중에 속한 평범한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겸손한 사람.

 

김씨는 훌륭한 공예품은 만드는 과정은 물론 만들어진 이후 사람들이 얼마나 실용적으로 사용하는지 여부에 따라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칠보공예는 반영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어 매력적이다고 말했다. 김씨는 세계적으로 선진국일수록 칠보공예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는다면서 우리나라의 경우 칠보공예에 대해 점차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은 취미로 배우는 단계에 머물고 있어 아쉽다고 덧붙였다. 또한 김씨는 칠보공예를 업으로 삼아 전문적으로 배우려는 사람이 많지 않아 아쉽다면서.

한국의 유산 이소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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