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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석패물가공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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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엄이 담긴 귀한 것

 

 

무형문화재 옥석장 김영희 선생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호박, 비취, 산호 등 전통보석을 세심하게 다듬어 만들어낸 노리개, 비녀에서 장인의 정성이 느껴진다.

옛사람들은 옥에 다섯 가지(, , , , )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어요. 옥을 몸에 지니면 재앙을 막고 건강을 지키며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죠. 그래선지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엔 유 독 자가 많이 붙어요. 맑고 고운 소리를 옥구슬이 굴러가는 소리로, 예쁘고 귀한 아들을 옥동자로 표현하잖아요. 옥체, 옥좌, 옥새처럼 왕이 가진 것들에도 자를 붙이고요. 그토록 귀한 재료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큰 행복이죠.

 

영화 황진이’(2007)를 위해 선생이 만든 노리개, 비녀, 떨잠 등도 예사롭지 않은 아름다움을 뽐낸다. 이 대표는 “‘황진이의 장신구들은 이미 프리뷰를 통해 다 팔렸다.”고 했다. 들어간 정성과 고급스러운 재료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 눈썰미가 있는 VIP 고객들은 놓치지 않았다. 물론 송혜교가 착용했던 장신구라는 프리미엄도 한몫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8호 옥석장 김영희 장인은 운영하는 예지방에 가면 궁중에서 쓰였던 옥 노리개, 패물 등 장신구를 비롯하여 현대적인 브로치, 악세서리 등 장신구들을 구경할 수 있다. 김영희 장인이 세공한 옥에 부인 신옥순 선생이 땋은 매듭을 이으면 화려한 옥과 은은한 매듭의 조화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노리개가 탄생한다. 서구적인 숍이 즐비한 삼청동 길가에 들어선 예지방에서는 세련된 손맛이 느껴지는 전통을 보여준다.

 

또한 예지방에서는 2011년을 시작으로 장신구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과 이수자 과정의 전수교육을 하고 있다. 전통옥석패물가공과 금, 은세공을 교육하여 전통과 현대의 디자인을 응용한 브로치, 목걸이, 귀걸이, 반지 등 다양한 종류의 장식물과 장신구를 가공, 제작하는 과정이 있고 전통 옥석패물 가공기법으로 노리개, 비녀, 가락지, 뒤꽂이, 족두리, 화관 등 여러 종류의 전통 장신구를 제작·가공, 기능을 전수하는 교육이 이루어진다.

2005년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는데, 40대 후반이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셈이다. 그의 작품은 UN본부 한국관을 비롯하여 일본 동경 메구로구미술관, 영국 황실 등에 소장되어 전 세계에서 그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시작한 공예

 

고향 홍성을 떠나 대전의 중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1970년 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열두 살의 소년은 어머니를 여의고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왔다. 서울행이 전학을 의미하는 줄 알았던 어린 김영희는 그러나 쇠락한 집안 형편 때문에 학교 대신 공방으로 몸을 옮겨야 했다. 그 때 그가 찾은 곳이 당시 패물세공의 일인자로 꼽히던 김재환(金在煥) 선생의 공방이다.

 

라면 한 그릇에 밤일을 하던 당시 분위기에서 어린 나이에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오로지 사람을 통해서만 전수되는 엄격한 도제식 교육환경과 적은 보수 등으로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도 소년은 포기하지 않고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작한 일은 고통이고 슬픔이었습니다. 한동안은 힘들었다는 기억 밖에 없었어요. 나이가 들면서 내가 하는 일이 전통을 지켜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에 대한 매력도 느끼게 됐습니다. 물론 지난날의 어려움도 위로가 되고…….”

심부름과 허드렛일을 도맡아하면서, 천공(天工)이라 불리던 스승의 작업을 곁눈으로 열심히 지켜봤다. 그게 통했던 걸까. 꼬마(막내 제자를 공방에선 그렇게 불렀다) 생활 1년 반 만에 스승은 그에게 의자연장을 내주었다.

 

노리개, 가락지, 장도, 비녀, 각 대, 떨잠. 장신구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동안,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설움도 서서히 사라졌다. 보석을 다듬는 일이 마음을 다듬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그 때문이다. 스승의 다른 제자들이 모두 공방을 떠났을 때도, 그는 꿋꿋이 남아 보석과 마음을 동시에 다듬었다.

 

선생님 밑에서 꼬박 19년을 일했어요. 독립을 하게 된 것도 선생님의 권유 때문이었죠. 그토록 엄했던 분이 요즘 찾아뵈면, 눈물을 글썽이면서 고맙다고 하세요.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제 성장을 계속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어요.”

 

1987년에는 예지방이라는 자신의 공방을 열고 독립하면서 전통 제품 재현과 함께 가슴 속에 품어 왔던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쉬는 날이면 박물관과 서점을 찾아다니며 관련문헌과 자료를 뒤지고 눈으로 손으로 배웠다.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하는 한편 재현과정에서 문제에 부딪치면 해결할 때까지 머리를 싸매고 연구했다. 그의 이런 습관은 대충대충을 용납하지 않던 스승의 가르침 덕이었다.

 

그의 이런 노력은 1999년 대한민국전통공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각종 공모전에 입상하면서 빛을 발했다. 98년 남북유엔 동시가입기념 백옥모란문 향합과 99년 일본 한국문화원의 노리개, 영국여왕 한국방문기념 순종황후화관 등을 제작하면서 옥석패물가공분야의 대표적인 장인으로 인정받았다.

 

덕분에 그가 재현한 전통 장신구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과 캐나다 오타와 한국문화원에 노리개를 비롯한 장신구가 전시되어 있고,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한국 방문 기념으로 복원한 순종황후 화관은 영국 황실에, 오랜 시간 공들여 재현한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장신구 100여 점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단단한 옥을 자른다

 

옥석패물 가공은 사람들 개개인의 염원을 담아 귀하디귀한 돌을 정성스레 깎는 일이다.

옥은 자르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단단하기 때문에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결을 살리면서 작업해야 해요. 그래서 좋은 원석을 고르는 일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근데 그게 쉽지 않아요. 조선시대 문헌을 뒤져 좋은 원석이 나올 만한 곳을 찾아가면, 광산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나 빌딩이 들어서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귀한 돌을 어렵게 만났을 때의 기쁨이 그래서 더 크죠.”

 

어렵사리 구한 원석을 그는 몇 년씩 잠재우곤한다. 미리미리 구입해뒀다가, 원석을 어떤 장신구로 새로 태어나게 할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의 아이디어는 수시로 바뀐다. 메모하는 습관이 생긴 건 그래서다. 스쳐가는 영감을 메모지에 붙잡아두고, ‘원석이 건네 오는 말이 들릴 때까지술을 익히듯 생각을 익힌다. 단번에 가공하지 않고 오래오래 생각을 발효시킨 뒤, 단숨에 자르지 않고 차근차근 원석을 다듬어야 비로소 태어나는 작품. 오랜 시간과 긴 기다림이, 가뜩이나 귀한 옥을 별처럼 빛나게 한다.

 

세공하는 시간보다 원석을 깎아내는 시간이 더 길어요. 겉보기엔 우아한 작업이지만, 실은 굴을 파듯 지루한 작업이에요. 덕분에 인내하는 법을 배웠어요. 어떤 일이든 꾀부리지 않고 묵묵히 견뎌내는 습관을 옥이 심어준 거죠.”

나누는 법도 옥이 가르쳐준 걸까.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쓰인다면, 그는 언제든 기꺼이 작품을 기증한다.

 

옛것을 되살리며

 

옛것을 복원하고 있노라면, 나와 같은 장인이 그 시절에 이걸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져요. 이름을 알리는 일도 아니고 큰돈을 받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왕실의 것을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정성스레 세공을 해나갔겠죠. 그 사람의 마음을 따라가며 작업을 하다 보면, 혼자 하는 작업인데도 전혀 외롭지 않아요.”

정부 가능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 지하에는 지금도 사용할 수 있는옛날 도구들이 있다.

투조기, 연마기, 비비. 이따금 그것 들을 만지며, 지금보다 몇 배는 힘든 작업을 했을 옛사람의 마음을 헤아려본단다.

 

원석에 불과한 백옥, 비취, 호박, 산호 등이 그의 손을 거치면서 임금의 요대가 되고, 사대부 여인네의 비녀가 되고, 선비의 장도가 되었다.

 

무엇이 그를 오늘의 장인으로 서게 했을까. 이에 대해 그는 (이익)’에 둔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전통제품 재현은 관계전문가의 자문과 고증을 통해서 이뤄지는데 그동안 재현품을 팔라는 요구가 많았어요. 하지만 아직까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는 단 한 점도 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장신구마다 각각의 장식에는 기원, 장수, 다산, 주술 등 그 의미가 담겨 있다고 김씨는 설명한다. 용과 봉황은 왕족의 고유 문양, 박쥐는 복(), 학이나 대나무는 지조와 절개, 목단은 행복과 화합, 거북등껍질은 장수를 상징한다. 그래서일까 옛것들을 재현하면서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는 그는 경외심과 함께 부끄럽지 않은 장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되뇌인다.

 

우리의 전통 장신구는 중국이나 일본 것과 달리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고 소박한 선을 가지고 있어요. 독창적인 아름다움, 이 점이 바로 우리 것의 매력입니다.”

김영희 장인은 우리 장신구의 매력을 독창적 아름다움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값싼 중국제품들이 상업적으로 밀려오면서 우리 것이 설자리를 잃어 가는 현실에 대해 그 역시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많은 사람들이 기술을 배워 전통문화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고 전통을 지켰으면 한다는 그는 이를 위해서는 교육적 차원에서의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고 덧붙인다. 아울러 자신 역시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홍보전시회도 자주 갖고 좋은 작품 제작과 전통품 재현에도 적극 나설 계획이다.

 

한편 옛것을 복원하는 일만큼이나 옥공예의 현대적 해석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전통 기법을 바탕으로 하되 지금 이 시기에 맞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전통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믿기 때문이다.

 

야심작이요? 그런 거 없어요. 이 작업을 오늘까지만 한다면 이게 야심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내일도 모레도 또 새 것을 만들 테니 함부로 말할 수 없죠. 살아 있는 한 계속 이 일을 할 거예요. 그러니 야심작이 뭐였는지는 죽는 날에야 말할 수 있겠네요.”

한국의 유산 김은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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