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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목침 김종연



전주 한옥마을의 명소, 목우헌(木遇軒)

 

전주 한옥마을에는 그 명성에 걸맞게 수많은 명소들이 즐비하다. 그 가운데 목공예 공방인 목우헌은 단연 돋보이는 장소 중 한 곳이다. 이곳은 들어서는 초입부터 예사롭지 않은 간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목우헌이란 이 간판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판으로 정평이 나 있다.

목우헌(木遇軒)’은 나무와 만나는 집, 나무를 다루는 집주인과 만나는 집이다. 2001년 가을 한가로운 한옥마을에 문을 연 목우헌은 지금은 세상을 떠난 박배엽 시인, 그리고 안도현 시인과 소설가 이병천 씨가 머리를 맞대고 붙여준 이름이라고 한다. 목공예에 녹아 있는 장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다.

 

목우헌은 기능전승자(2005-2) 김종연 선생의 전시관이자 작업실로 전통과 현대 공예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전시된 작품으로는 전통목침, 다식, 약과틀, 서각, 조형 작품 등 생활용품과 장식품들이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서각, 전통 기러기, 문패 만들기 등의 체험을 즐길 수 있다.

 

목우헌을 운영하고 있는 김종연 선생은 전통 목침 분야의 기능 전승자이기도 하다. 그의 공방은 항상 대중들에게 열려 있으며 보기 드물게 작품 사진들을 찍어도 전혀 제지를 받지 않는다. 대부분의 공방은 물론, 개인이 운영하는 액세서리 전문점마저도 디자인 유출 등을 우려해서 사진촬영을 금하는데 김종연 선생님의 관대함에 그 이유를 묻자,

글쎄요, 그건 예술가의 양심에 맡겨야 될 문제 아닐까요? 그리고 하나의 작품이 탄생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세월과 사색과 고민이 있어야 하는데 그저 모방한 작품에서 그 깊은 맛이 과연 나올 수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작품을 가까이 다가가 그 세부적인 묘사를 바라보노라면 그 정교함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작품들은 역시나 다양한 형태의 목침들.

 

목침, 나무를 베고 잠든다

 

일설에 의하면 목침의 역사는 약 1억 년 전이라고 한다. 고려도경29권에 수침(繡枕)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이로 보아서 베개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사용된 것이 확실하다. 현재 가장 오래된 목침의 유물로는 공주국립 박물관 유물 626호인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목침이다. 통나무를 사다리꼴로 다듬은 뒤 그 긴 변의 중앙을 움푹 파고 머리를 놓을 수 있게 했다. 전면에 붉은 칠을 하고 그 위에 금박을 오려 붙여서 귀갑문을 새겼으며 그 속에 연화 무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문양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 시대에 사용했던 베개의 종류는 수침·퇴침(退枕목침·나전침(螺鈿枕도침(陶枕곡침(穀枕면침(綿枕) 등이 있는데, 목침은 소나무 이외의 목재를 길이 6, 4치 정도의 장방형으로 만든 간단한 것으로 특히 여름철에 하류층, 또는 농가에서 많이 쓰였다. 상류층에서 사용되던 목침은 목세공 혹은 후벼리 구멍을 뚫은 것 등 뛰어난 예술작품이 많다.

 

그 외 여러 박물관이나 대학에 소장된 전통목침은 약 250여 점으로 형태는 둥근, 사각, 직사각, 짜 맞춤, 동물모양 등으로 다양하며 귀족들의 멋을 낸 목침은 양쪽에 호랑이, 도깨비, , 수복강령 등 글귀를 조각하여 사용하였다.

 

서민들이 즐겨 쓰던 사각 목침도 다양한 문양이나 모양을 한 목침이 많지만 현대인에게는 너무 높아 불편하다. 이러한 연유로 목침은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사장되게 되었다. 좀 낮으면서 현대인의 체형에 맞게, 다시 말해 인체공학 측면에서 편안하고 건강에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각도조절 등 다양한 기능이 더해진 현대 목침이 탄생하게 된다.

 

목침은 말 그대로 나무로 만든 베개다. 오동나무, 물푸레나무, 편백나무가 주재료로 쓰인다. 오동나무는 가볍고 감촉이 좋을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서 가장 좋은 재질로 손꼽힌다. 물푸레나무는 나뭇결이 아름다워 주로 작품을 만들 때 쓰인다. 편백나무는 피톤스드 방출량이 제일 많은 목재로 아토피가 있는 사람에게 치유용으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고 실제로 효과도 크다.

 

목침을 만들다 보면 옛 어른들이 얼마나 지혜로웠는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나무는 도자기나 금속보다 따뜻한 성질을 가지고 있고 틈새로 바람도 잘 통해 솜베개에서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과 쾌적함도 느낄 수 있어요.”

김종연 선생이 전통문양을 넣어 정밀하게 깎아 놓은 목침은 섬세함과 아름다움으로 눈과 마음을 먼저 빼앗는다. 그의 작업실에 전시돼 있는 목침들. 은행나무, 느티나무, 박달나무, 감나무, 오동나무 등 옛 문헌에 나와 있는 목침은 모조리 만들어 봤다고 한다. 잡귀를 물리치는 호랑이를 암수 함께 조각하고,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와 신선사상에 따른 구름 등을 새겨 넣었다. 서랍 속에 약초를 넣어 몸에 이로운 향이 올라올 수 있도록 몸체에는 약제서랍도 만들어 놓았다. 단단한 나무를 깎아 목침을 만들어 내는 동안 굳어질 대로 굳어진 그의 손에는 또다시 굳은살이 박혔다.

 

목각이 좋아서 밤을 새던 소년, 명인이 되다

 

골동품상에서 좌우대칭 호랑이 목침을 재현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처음 만들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재현한 목침의 반응이 좋아 하나 만들어 놓으면 하나 팔리고 하다 보니 재미가 붙었다.

 

2005년 국내 유일의 전통목침 부문 기능 전승자로 일찌감치 이름을 알렸기 때문. 그의 나이 마흔넷, 최연소로 대한민국 기능전승자로 인정받아 전통목침 최고의 권위자로 꼽힌다.

워낙 단단한 나무를 다루다 보니 대팻날이 빠져나와 왼손팔뚝을 파고들기도 하고, 왼손 검지는 이미 제살을 깎아 피부를 이식해 울퉁불퉁한 터라 모양새가 말이 아니다. 왼손 새끼손가락의 감각은 무뎌질 대로 무뎌진 상태. 칼을 든 오른손은 늘 왼손에 안타까운 훈장을 남기기 일쑤다.

 

심지어 그 훈장은 첫째 아들의 눈썹에까지 남아있다. 5살 때 아버지의 작업실에 놀러온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조각칼을 가지고 폼을 잡아보다 눈썹을 베였던 아찔한 순간을 생각하면서 지금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 모든 것들은 그를 지금의 대한민국명장으로 이끈 쓰라린 추억이다.

 

또한 자연이나 기하무늬 등을 주로 사용했지만, 단순히 옛것을 재현하는 데 머문다면 명인으로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민속박물관과 옛 문헌, 구전으로 전해지는 모든 기록들을 샅샅이 찾아내 전통과 현대를 조합한 작품을 제작하는 데 집중했다. 목침을 단순히 수면을 위한 도구가 아닌 옛 것의 멋스러움을 되살린 작품으로 승화시킨 산증인인 셈이다.

 

사실 그의 손재주는 어머니를 꼭 빼닮았다. 댕댕이소쿠리와 싸리나무 채반 등을 아주 잘 만들었던 어머니. 그래서인지 김 명장도 어릴 적부터 만들고, 깎고 하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도장을 파다 손을 다친 형을 대신해 도장을 파주면서 자신의 능력을 깨닫게 되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선생님, 동네 어른들, 친구들 도장이라면 모조리 파줘 온갖 학용품을 선물로 받아 직접 사서 쓴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얼마나 목조각이 재미있었는지 공부를 하면서 날을 샌 적은 없어도, 조각을 하면서 밤을 새기 일쑤였죠.”

반쯤 넋을 빠뜨린 채 조각에만 매달리는 아들의 모습이 밉기도 미웠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오른쪽 발목 근처를 크게 베어 큰 화를 입은 적이 있었는데도 어머니의 꾸지람 걱정에 말도 못한 채 혼자서 러닝셔츠를 찢어 지혈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목각에 애정이 많은 선생님을 만나 성모상 여인상, 판화 등을 조각해서 학교 행사 전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가정형편상 대학진학을 포기한 그가 처음 정을 잡고 나무를 다듬기 시작한 것은 81년의 일. 현재 여주에 있는 목아박물관의 모태인 목아미사 개발부에 입사해 본격적인 목공예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한 달 수입은 고작 6만원. 기숙사비 4만원을 내고 나면 2만원 밖에 남지 않았지만, 목공예를 배울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만으로 기뻤단다.

 

장성한 나이에 생활비가 넉넉하지 못해 어찌나 배가 고팠던지 몰라요. 나무라는 소재가 갖고 있는 부드러움과 소박함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어 배고픔도 잊었던 것 같아요.”

그가 전문적인 길을 걷게 된 것은 86년께다. 공병대를 나와 중장비면허증을 4개나 보유했던 그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건설회사에서 4개월여 간 직장생활을 한 적도 있었지만, 도저히 목공예를 향한 사랑과 집착을 놓을 수 없었다고.

 

결국, 전주에 내려와 개인 공방을 열게 되고 뭐든 잡히는 대로 일을 했다. 보증금 50만원을 겨우 마련해 구한 한 평 반짜리 작업실이 그에게는 소중했다. 이전에는 불상과 동물 조각만 해왔는데, 자신의 이름을 건 공방에서는 뭐든 다 할 수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모방도 많이 하고, 만들기도 많이 만들었다. 절대 게으름을 피우는 일도 없었다. 각종 공모전에 출품해 50여 차례 수상도 했고, 이름을 알렸다.

 

작품을 하는 데 있어 실기도 중요하지만 이론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그는 이론과 실기를 겸비하고자 대학도 늦깎이로 입학해 공부했다. 가장으로서 4년 동안 대학에 다닌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알아 간다는 것에 참 행복했다. 배움의 열정은 식지 않아 그 뒤로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치면서, 전통공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옻칠까지 마스터하기에 이른다.

그는, “과거에는 목공예가 돈도 안 되고 너무 힘든 일이다 보니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피하곤 했지만 이제는 마음이 달라졌어요.”

라면서 공예작업의 환경도 많이 바뀌었고 좋아진 만큼 목공예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도록 적극 나서고 싶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전통과 현대공예를 아우르는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작업들을 하고 싶다는 게 그의 포부다.

 

나무 길들이기

 

흥미도 있고 좋아서 시작했지만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도 있지만 지금은 성취감을 느끼며 일하고 있습니다. 목침을 단순히 수면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옛것의 멋스러움을 되살린 작품으로 승화시키겠다는 각오로 이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단순한 쓰임새, 실용을 따져서는 계속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성을 다해 간 칼이 딱딱한 나무에 부딪쳐 금세 이가 나갈 때면 그는 맥이 빠진다고 했다. 그럴 때면 나무를 다루는 것은 평생을 배워야 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마음 속에 새겨넣는단다.

 

전통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죠. 오랜 시간을 두고 단단해져야 하는 나무와 같아요.”

나무가 오랜 세월을 견뎌 단단해지듯이, 그가 일궈야 할 전통도 오랜 세월을 나무처럼 있으라 한다.

 

나무는 칼 끝이 지날 때마다 다른 빛깔과 다른 목리를 드러내며, 향긋한 냄새를 피어내지요. 나무는 많은 시간을 쏟아야만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지만, 그래서 더욱 성취감이 큰 것 같아요.”

다른 이들에게는 목석(木石)의 세월로 흘러갔을 것을 그에게는 향기를 남기고, 속살을 보이며 흘러갔던 것. 그래서 지금도 목침을 깎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한국의 유산 김은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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