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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한지공예> 김한수





호젓한 전통한지의 매력

 

완주군 소양면에 위치한 대승한지마을 승지관에서 개관 2주년을 기념하고, 전통한지의 아름다움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한지작품 전시회를 지난 2012년에 열었다. 조상들의 지혜와 삶의 흔적이 오롯이 담긴 생활용품을 한지공예 작품으로 재탄생시킨 지호공예 작품전시회.

 

대한민국 전통한지공예 전승자인 평산 김한수(金漢洙, 75) 선생의 작품 30여 점을 가지고 한지, 그릇이 되다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 전시회는 전통공예의 아름다움과 한지의 변신을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과거만 해도 일반 서민 가정에서는 문살에 바르고 남은 창호지 따위를 모아 일상에 필요한 갖가지 소품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이런 재활용 종이를 찢어 물에 불린 뒤 종이죽을 만들어 찹쌀풀과 섞어 일정한 틀 위에 종이죽을 반복해 덧붙여 반짇고리나 함지박, 항아리 등을 만드는 기법을 지호공예라 한다.

 

한지공예는 질긴 닥종이를 주재료로 유황과 백반, 송진 등 20여 가지의 각종 재료가 사용된다. 건조과정만 1~3년까지 걸리는 데다 작품 완성까지는 예술가의 인내심과 끈기를 필요로 한다.

 

승지관에는 화병, 항아리, 함지박, 예단함 등으로 그 옛날 조상들이 실생활에 직접 사용해오던 생활용품들이 선보였다.

 

2011년에는 그가 살고 있는 화순군에서 지호(紙湖)와의 동행(同行)’을 주제로 김한수 선생과 12명의 문하생이 준비한 한지공예 작품 30여 점을 전시하기도 했다. 2009년에도 서울 인사동 갤러리 31에서 지호와의 동행을 주제로 전시회를 갖는 등 다수의 전시회를 가졌다.

 

김한수 명인은 국내 유일의 지호공예(紙糊工藝)의 기능전승자로 평생을 지호공예에 바쳤다. 고향인 경남 통영을 떠나 화순에 정착한 지 삼십여 년이 더 되도록 창작활동을 해오고 있다.

 

1996년 노동부로부터 대한민국 기능전승자와 대한명인으로 지정됐으며 2005년에는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장려상을 수상했다. 독일 파리, 로마, 일본 등을 비롯해 제1회 한일종이작품교류전도 가진 바 있고, 세계 친환경 엑스포 전시와 각종 축제 전시 각종 박람회와 유명백화점 전시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시회를 가졌다.

 

김한수 명인은 전주예원대학 대학원 지호공예 외래 교수와 국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박물관, 담양박물관 등에서 5년 동안 강의를 했고 각종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지금은 화순읍 향청리에 있는 경화당에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검소와 투박한 생활에서 공예

 

한지공예는 물자를 아끼는 검소한 마음, 투박하면서도 절제된 탈속미(脫俗美)가 결합한 예술로 조선시대부터 우리 민족 고유의 생활예술로 자리 잡았다.

 

지금이야 종이가 흔하지만 과거만 해도 일반 서민 가정에서는 문살에 바르고 남은 창호지 따위를 모아 일상에 필요한 갖가지 소품을 만들어 사용했다. 못 쓰게 된 서책을 뜯어 손으로 꼬거나 조각 종이를 겹겹이 붙여서 그릇을 만들었다. 이러한 종이제품은 다른 재료를 이용해서 만드는 물품에 비해 만들기 쉽고 비용도 적게 들어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런 이유 탓에 한지공예를 자연의 미와 실용의 미가 조합된 환경재활용 공예품이라고 한다.

김한수 선생 역시 어린 시절, 폐창호지 등으로 일상소품을 만들어 쓰던 모친으로부터 자연스레 한지공예를 배웠다.

 

모두가 배고픈 시절이었기 때문에 배불리 먹을 욕심에 하기 싫어도 열심히 했어요. 외할머니가 손재주가 좋았는데 어머니도 동네에서 입소문이 나셨어요. 나야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옆에서 보조하는 정도였어요. 그 때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일상 소품을 그렇게 만들어서 곡식과 바꾸고 했었어요.”

당시야 부모님 말씀 거역했다가는 영락없이 굶기 십상이니까 싫든 좋든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지요. 잘하면 밥을 고봉으로 주고 안하고 뺀들거리면 밥을 탁 깎아 버리니 할 수 없이 했지요.”

 

그의 표현대로라면 당시에는 공예가 아닌 생활이었고, ‘배움이 아니라 노동이었다.

생활이고 노동이던 일이 훗날 그에게는 가르침이 되었고 공예가의 길을 걷게 된 밑거름이 됐다. 그렇게 시작된 한지와의 인연을 따지자면 50여 년의 세월을 훌쩍 넘겼다.

학창시절 공예 작품으로 여러 상을 받기도 한 선생은 1970년대 친구에게 결혼식 선물로 지호 작품으로 된 오리 한 쌍을 함으로써 다시 지호공예에 뜻을 두고 풍수지리적 요건이 좋은 화순으로 이사와 경화당’(경남과 화순의 합성어)을 마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한지공예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뜻하지 않은 사업실패를 겪었던 30대 중반이 넘어서였다. 다소 늦은 나이였지만 그는 한지공예가의 길로 나아갔다. 79년 우연한 기회에 화순에 내려와, 그 소문 무성하던 5·18을 목격하고, 의지할 데 없는 그가 전라도 땅 화순에서 한지공예가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5·18 후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화순에 자리 잡았을 때, 동네서 쌀도 거둬주고 보리쌀도 주고 산 설고 물 설은 생면부지 사람들이 동기처럼 도와준 인정을 지금도 못 잊지요.”

한지공예는 제작기법에 따라 종이를 꼬아서 만드는 지승(紙繩)공예, 종이반죽을 사용하는 지호공예, 종이를 재단해서 쓰는 전지공예, 다양한 색지를 이용한 지화공예로 나뉜다.

지승공예는 종이로 꼬아 만든 새끼줄이 있는데, 주로 노인이 한가한 시간에 옛 책을 한 자 넓이로 길게 찢어 새끼를 꼬듯 비스듬히 말아 끈을 만들었다. 지승 공예는 조선 후기에 발달해 여러 모양의 형태가 만들어졌는데, 방석 종류를 제외하고는 주로 둥근 용기가 많다. 곡식을 넣어 두는 함지박, 망태, 화병, 고비, 뚜껑이 있는 그릇, 호리병, 옷상자, 항아리 등이 대표적이다. 문양을 넣어 옻칠을 한 것도 있고, 뚜껑이 있는 호리병에는 씨앗 등을 넣어 보관했다. 옻칠을 한 지승은 물이 묻어도 젖지 않아 세숫대야를 만들어 쓰기도 하고, 가볍고 소리가 나지 않아 혼례용 가마 안에서 쓰는 요강을 만들기도 했다. 이 밖에도 지승으로 만든 물건은 제기, 기러기, 짚신, 필통, 베개 등 다양하다. 주로 못 쓰게 된 옛 책으로 지승을 만들었는데, 옛 선비의 집에서는 혼인할 때 패물함을 묶는 데도 사용했다.

 

김한수 선생은 이러한 제작기법 중 종이죽을 이용하는 지호공예 전문가다. 지호공예는 우선 물이 좋아야 한다. 우물물인지 수돗물인지 미미한 차이도 다 보인다는 그는 꼭 우물물을 고집한다. 그래야 색깔을 제대로 내고 벌레가 안 생긴단다. 그 다음은 바람이 잘 통하고 햇볕이 좋아야 하기 때문에 봄, 가을이 적기다. 이런 조건 때문에 보통 한 작품을 만들 때 6개월 정도 걸린다고 한다. 지호공예는 다른 기법과 달리 모형을 사용하는 데도, 뒤틀리거나 수성인 관계로 실패를 많이 한다.

 

한지나 닥 등을 분말에 가까운 형태로 잘게 찢어 물에 풀어 녹인 다음 접착력을 높이기 위해 찹쌀풀을 끓인 유황 등 재료를 다 넣고 배합하여 떡시루에 쪄낸다. 이것을 절구에 찧어 모형틀에 비벼 넣고, 햇볕에 70% 정도 마르면 통풍이 잘되는 반그늘에 말린다. 90% 정도 마를 때 형틀에서 떼어내고, 건조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라짐을 방지하기 위해 삼베를 입혀 손으로 무늬를 만들면 백골이 완성된다.

 

이때부터 수백 사포질과 칼질을 하여 모양이 나오면 동백기름, 대두유, 송진 등으로 마무리하고 치자, 쑥물 등으로 색깔을 낸 후 옻칠이나 황칠로 마무리하지만 요즘은 시각 효과를 좋게 하기 위해 다양한 색을 쓰기도 한다.

 

고된 과정의 끝, 희열

 

제대로 된 색감을 내기 위해 물도 우물물을 사용하고, 색감을 내기 위한 치자물이나 황토, 갯벌 등도 명인이 직접 전국을 다니며 양질의 것을 구한다.

 

제작과정에서 건조과정은 특히 중요하다. 너무 춥거나 더운 날씨는 부적합하기 때문에 봄과 가을이 적기다. 이런 작업 특성상 한 작품을 만드는 보통 6개월 정도가 걸린다. 운주사 원형석탑 모형의 경우 2년이 걸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련의 작업들이 모두 수작업으로 이뤄지다 보니 작품을 끝내고 나면 손끝이 짓무르고 손가락 관절이 저려온다. 그 역시 이 일이 고된 작업임을 숨기지 않는다. 더구나 요즘은 이로 인해 지호공예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토로한다. 고된 만큼 보상이 되는 것도 없다 보니 배우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배워 맥을 이어줬으면 하는 바람도 덧붙인다.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스스로도 고된 작업이라는 한지공예는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동안 몇 번 걷어찼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말로 쉽게 표현은 안 되지만 한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느끼는 희열이 있어요. 그런데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마음에 드는 것은 없으니까.”

 

심신이 고단한 과정이지만 끝손질을 마쳤을 때 느끼는 희열이 그에게는 끊임없는 원동력이 됐다. 그렇다고 욕심을 부릴 생각도 없단다. 욕심이 지나치면 물욕만 차오르기 때문이다. 작품을 만들 때는 물 흐르듯 흘러가야 원하는 작품을 얻을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한지는 고려 때 지불(紙佛)로 만든 것이 최초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배불정책이 시작되면서 지불 드는 것 자체가 없어지고, 그 스타일로 이어진 것이 용기라고 추정한다. 이것이 대중화되어 대가(大家)에서는 양푼이나 용품으로 쓰이던 것이 현대에 와서는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 등 용기 발달로 찾는 이가 별로 없고, 힘든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명맥이 끊어질까 걱정이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이만하면 됐구나 싶은 때가 없단다. 하지만, 몇 천 년 후에도 길이 빛날 지불을 만드는 게 그의 소망이다.

한국의 유산 김은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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