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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 김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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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지옥에서

지금은 아련한 망치소리이지만,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대장간은 드물지 않았다. 내 고향에 있던 대장간 이름은 참 멋졌다.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철지옥인 줄 알았는데, 중학교 때 보니 철치옥(鐵治屋)’이었다. 철을 불에 넣다가 꽝꽝 때리는 모습을 장날이면 봤던 터라, ‘철이 들어가면 지옥이라서 철지옥이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는데…….

내가 철지옥이라고 알고 다닐 무렵만 해도 시골장터나 마을 단위로 대장간이 있어 무뎌진 농기구나 기타 각종 연장을 불에 달구어 벼리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풀무질의 장단에 맞춰 쌕쌕 소리를 내며 뜨거운 불을 토해내는 화덕, 육중한 망치질에 여기저기 조각불을 흩뿌려 놓는 시뻘건 무쇠 덩어리, 그리고 대장장이의 힘찬 메질 소리는 오직 대장간에서만 보고 들을 수 있는 신기한 풍광이었다.

 

치열한 삶의 열기와 땀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대장간. 허나 이제 도시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담은 대장간이 현대 산업기술에 밀려 우리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것이다.

 

전주시 완산구 서완산동에는 상공에서 내려다본 산의 모습이 마치 용의 머리 형상을 닮았다고 해 이름 붙여진 용머리고개가 있다. 이곳에선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린 듯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데, 바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동품 가게와 대장간이 만들어내는 이색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서완산동 용머리고개에 조그맣게 자리한 한일민속대장간’, 이곳은 도내에서 유일하게 전통방식을 지키며 대장간의 맥을 잇고 있는 공간으로 더욱 유명하다. 급변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꿋꿋이 전통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 반 세기가 넘는 긴 세월 동안 대장장이로 살아온 주인 김한일(70) 씨의 굳은 신념과 장인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터다.

 

물론 기술이 좋아지면서 우리도 현대의 기술을 접목해 사용하기도 하죠. 하지만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옛부터 전해 내려오던 그 방식 그대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모든 물건을 기계로 사용해 만들면 편리하고 수익도 나아지겠지만, 직접 담금질하고 두드려 정성껏 만든 대장간의 연장이 더욱 우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그의 생활터전이자 작업실인 한일민속대장간은 언제나 탕! ! ! 쇠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열여섯에 시작한 대장간 일

~! ~!” 둔탁한 쇠망치 울림소리가 퍼지면 이내 벌겋게 달아오른 쇳덩이가 제 모양을 찾아간다. 용광로에서 갓 나온 쇠뭉치의 온도는 섭씨 3800. 쇳덩이는 불과 30초도 안 돼 말을 듣지 않는 섭씨 3000도 밑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대장장이의 손놀림은 정신이 없다. 뜨거운 온도 때문에 온 몸에서는 땀이 비오듯 한다. 호미, , 도끼부터 각종 곡괭이와 솥단지는 그렇게 대장장이의 땀을 받으며 만들어진다.

 

뜨거운 화덕 속에서 벌겋게 달궈진 쇠뭉치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메질하기를 수십 번.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뭉퉁한 쇳덩이가 어느새 한쪽 끝이 예리한 돌쩌구로 변했다.

그의 땀과 거친 숨에서 탄생한 물건은 호미에서부터 칼, , 특수 망치 등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그의 손을 거치면 만들어지지 않는 물건이 없는 것. 수십 년 세월이 꼬박 담긴 장인의 손길은 노련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긴 여정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그가 처음 대장장이 일을 시작한 것은 16세 어린 나이, 아직 철모를 때였다. 형님과 함께 남부시장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면서부터다.

 

제가 어릴 적만 해도 먹고 사는 일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학교 진학도 못한 채 형님을 도와 대장간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죠. 당시만 해도 대장간이 잘 운영됐습니다. 호미, , 낫 등 주문량이 폭주하던 시절이니까요. 5명의 직원이 풀무, 집게, 해머질을 해대며 하루 종일 호미 150자루, 60자루를 만들 정도로 대장간 운영이 잘 됐죠.”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 먹고 살자고 시작했던 일이었다. 지금 같으면 일당이라도 받았으련만 그 당시에는 하루종일 고된 막노동을 하고도 세끼 밥만 주어도 감지덕지하던 시절이었다. 성실한 성격 소유자였던 그는 다른 일을 찾는 데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농부들에게 꼭 필요한 호미 낫 괭이 등 농기구를 잘 만들어 주는 일만 전념하기로 작심했다.그의 성실하고 근면함은 남문시장 안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소문이 파다했다.

대장간을 자주 찾던 방물장수 아주머니는 그의 성실함에 반해 지금의 부인인 박영숙 여사를 인생의 반려자로 중매해 지금까지 인생의 동반자가 됐다. 부인은, 

손재주를 보니 밥은 굶기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 양반과 결혼했어요라며 남편을 추겨세웠다.

하지만 아직은 앳된 소년에게 대장간 일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수동 풀무질부터 해머질까지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로 도망치기도 수차례. 대장장이가 아닌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도 노력했다. 하지만 운명의 굴레 속에서 그는 다시 대장장이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이후 그는 31세 때 전주 서서학동 공수네다리 인근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대장간을 차렸고, 1982년에는 마침내 이곳 용머리고개로 이전해 한일민속대장간을 40여년 째 운영해오고 있다. 대장간을 운영하며 32녀를 대학까지 가르쳤지만, 기계화 속에서 호황기는 지나갔다. 대장장이가 할 일을 기계가 대신하기 시작한 것. 어쩔 수 없이 직원 4명을 떠나 보내고, 혼자서 대장간을 지켜야만 했다.

대장간 일감이 줄어들자 주위에서 그만 두고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많이들 권유했죠. 실제로 전주에서도 대부분의 대장간이 문을 닫았고요. 그런데 저는 어려서부터 해온 일이라 그만 둘 수가 없었어요. 이제는 천직이 돼 버렸으니까요. , 제가 하지 않으면 앞으로 지역에서 대장간을 영원히 찾아볼 수가 없을 테니까요. 그런 생각에 오늘날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앳된 소년의 얼굴은 구리빛으로 그을려졌고 솜털처럼 부드럽던 손은 쇠뭉치처럼 단단해졌지만, 그는 스스로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장간 기술은 문화유산

 

옛날엔 괭이, 호미 같은 농기구랑 솥이 많이 팔렸지. 그때는 일일이 손으로 김 메고 해야 하니까 너도나도 농기구를 많이 사갔어. 지금이야 농업이 기계화 됐으니 잘 안 팔려. 호미 하루에 몇 개씩 팔고, 괭이나 낫 같은 거 또 몇 개씩 팔고 그러지 뭐.”

하루에 몇 개 나간다는 호미와 낫의 가격은,

~ 호미야 하나에 2천원. 낫은 5천원. 약초 캐는 곡괭이도 5천원 하지. 저기 큰 도끼는 2만원 정도 하고.”

가격은 생각보다 쌌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뻘뻘 땀 흘리며 만든 가치에 비해 값어치는 턱없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이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다.

 

 불이라는 것이 참 신기해. 쇠도 마찬가지구.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속성을 지닌 것 같아. 살아있는 생명과도 같은 거지. 매일 불을 대하지만 항상 달라. 어렸을 땐 그저 하는 것이려니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불을 다룰 수 있게 되더라구. 불을 제대로 다룰 줄 알아야 쇠를 다를 수 있지.”

장인의 말다웠다. 그는 대장간을 전통으로, 대장장이 일을 민속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제 이 일은 민속이야. 없어지면 안 돼. ,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연장도 수리해 줘야 하고, 가끔이지만 농기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대장간이 없어지면 안 되지. 조상의 얼이 담긴 대장간 기술은 하나의 문화유산이야. 나에겐 이 문화를 지키고 물려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거지

대장간 역시 우리의 전통이고, 나아가 없어져서는 안 될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세월을 두드린 사이, 어느새 그는 천생 대장장이가 되어 있었다.

 

 

막내아들이 장인 전수자로 나서

 

헌데, 요즘 들어서는 부쩍 힘에 부친다는 속마음도 털어 놓았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 들어감에 따라, 예전만큼 일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다행히 그의 막내아들이 2002년부터 대장장이 장인 전수자로 일을 연마하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나도 말렸어. 왜냐면 이 일이 원채 힘든 일이거든. 내가 반평생 해왔으니 알지. 그런데 이 놈이 뜻을 안 굽히는 거여. 그럼, 대신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했어. 쇠를 달구는 법부터 두드려서 모양을 맹그는 법, 또 물에 담가 열처리 하는 방법까지 오래 배우고 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함께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여.”

그의 막내아들 김창호(32) 씨는 한 기술만을 오랫동안 연마해 장인으로 인정받는 것은 어떤 일보다 경쟁력이 있고 매력있는 일이라며 빨갛게 달궈진 무쇠를 단련하다 보면 세상 걱정을 다 잊는 거 같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게다가 경기도에 있던 할아버지의 둘째아들도 대장간 일을 돕겠다고 내려와 이제는 3부자(父子)가 든든히 대장간을 지키는 중이다.

생활도 보장해주지 않는 고된 노동의 현장이지만, 전통이니까 지켜야 한다는 부자(父子)의 신념이 가슴 한구석을 파고든다.

 

같은 쇠라고 해서 다 같은 쇠가 아녀. 쇠마다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쇠에 따른 열처리 강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지. 그런데 이걸 기계가 대신 한다고? 어림없어.”

망치질에 여념이 없는 그에게서 장인의 옹고집이 느껴졌다. 그는 앞으로 대장간의 문화를 보존하고 그 맥을 잇기 위해서라도 무형문화재 지정에 힘 쏟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의 문화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형문화재 지정은 꼭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국의 유산 김은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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